최근 몇 년간 이어져 온 복고(레트로) 유행이 소셜미디어(SNS)와 결합해 새로운 니트 열풍을 낳고 있다. 불씨를 당긴 건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털로 짠 갈색 벙어리 장갑을 낀 채 웅크리고 앉아있던 버니 샌더스(80) 연방 상원의원이다. 정장을 갖춰 입은 첨석자들 가운데 등산점퍼와 털장갑 차림은 단번에 화제가 됐고 ‘밈(meme)’으로 이어졌다. 밈이란 사진 등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 콘텐트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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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뭉치게 한 털장갑
실제 샌더스 의원의 벙어리장갑은 2년 전 한 교사가 낡은 스웨터를 푼 실로 직접 뜬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SNS에는 색깔과 문양이 비슷한 장갑이나 스웨터를 올리거나, 이를 따라 만든 손뜨개 작품을 올리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 미국 매체 마켓워치는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인들이 최소한 털장갑을 낀 샌더스의 밈에 대해선 하나로 뭉쳤다(united)”고 평가했다.
미국에서 할아버지의 손뜨개 장갑이 화제가 됐다면 한국엔 ‘할미룩’이 있다. 할미룩은 할머니와 차림(look)을 합친 말로, 2030 세대가 할머니들이 입었을 법한 카디건과 넓게 퍼지는 긴 치마 등을 찾으며 등장한 신조어다. 이들은 스스로를 할매(할머니의 사투리)와 밀레니얼 세대의 합성어인 ‘할매니얼’이라 칭하며 ‘할밍아웃(할머니+커밍아웃)’을 자처한다. SNS에는 특정단어에 대한 글을 알리는 ‘#(해시태그)’를 붙인 ‘#할미룩’‘#그래니룩(granny look)’ 게시물들이 2만여 건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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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막론 알록달록 카디건 인기
할미룩을 대표하는 옷이 바로 니트다. 기계로 뽑아낸 가늘고 윤기가 흐르는 니트가 아니라, 손으로 짠 듯 굵은 실로 된 니트 카디건이나 스웨터 등이 인기다. 색상도 세련미 넘치는 무채색의 단색이 아니라 빨강·노랑 등 여러 색을 섞거나 꽃무늬 자수 등을 넣어 귀엽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이는 코로나19가 처음 확산하기 시작한 지난해 2월 영국의 인기가수 해리 스타일스가 ‘더 투데이쇼’ 공연 리허설 때 입고 나와 화제가 됐던 알록달록한 카디건과 흡사하다. 당시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집에 머물며 이 카디건을 뜨개질로 직접 뜨는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고 1차 니트 붐을 일으켰다. 이에 카디건을 만든 영국의 패션업체인 JW앤더슨은 “사람들이 카디건을 뜨개질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패턴을 모든 사람과 공유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국내 캐주얼브랜드 ‘스튜디오 톰보이’에서도 최근 노랑·빨강·갈색 등이 어우러진 카디건이 출시 한 달 만에 완판돼 재주문에 들어갔다. 직접 뜨개질한 것 같은 두터운 꼬임이 들어간 또 다른 카디건과 니트 조끼 등도 판매율이 100%에 달한다. 여성복 브랜드 ‘보브’도 지난해 말 출시한 카디건이 니트 제품 중 1위를 기록 중이다. 이 밖에 니트나 일명 ‘골덴’이라 불리는 코듀로이 소재로 된 긴 치마나 헐렁한 바지 등이 호응을 얻고 있다.
패션업체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복고풍은 한 때 촌스러움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MZ(밀레니얼+Z)세대의 주목을 받으며 최신 유행 스타일로 자리잡았다”며 “니트 제품이나 롱스커트는 디자인에 현대적인 요소를 넣어 편안하면서도 멋스런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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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실로 연결된 안도감
전문가들은 복고풍과 니트가 가진 독특한 감성에 주목한다. 최윤정 목포대 패션의류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힘겨우면 예전을 그리워하는데, 이런 심리가 대중문화와 패션, 특정 제품의 소비를 통해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지난 1970년대에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4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소비가 늘었는데, 지금은 80~90년대가 ‘돌아가고 싶은’ 때라는 것이다. 특히 실이 굵고 소박해 보이는 니트 소재의 옷은 인간적인 감수성을 불러일으켜 위안을 얻고싶은 사람들의 심리와 잘 들어맞는다.
SNS는 이런 심리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 교수는 “코로나로 물리적 만남이 단절된 상황에서 옷에 대한 정보나 만드는 법 등을 공유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연대와 유대을 느끼는 것“이라며 ”샌더스의 털장갑이 인기를 끈 것도 세대와 국적을 넘어 묘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