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74)이 한국 영화계, 더 나아가 글로벌 영화계의 새 역사가 됐다. 영화 '미나리(정이삭 감독)'를 통해 제93회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조연상 노미네이트에 성공한 윤여정은 한국 배우 최초는 물론, 첫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아카데미 입성이라는 대업을 세웠다. 이로써 칸·베를린·베니스로 이어지는 세계 3대 영화제를 넘어 할리우드의 심장, 아카데미시상식 후보 지명까지 세계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는건 100% 충무로 여배우들의 차지가 됐다.
데뷔 56년 차, 74세 배우에게 남은건 아름다운 은퇴로만 여겨졌다. 시니어, 중견, 원로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도 할 수 있는 역할, 행보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 결론 내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주위의 반대에도 감행한 도전은 최초라는 역사와 희망이라는 새 꿈을 선물했다. 윤여정의 아카데미시상식 입성은 역사적 기록을 넘어 새 활로의 개척이라는 의미를 더한다.
타이밍은 분명 좋았지만, 굴러 온 기회를 잡고 천운을 이끌어낸건 윤여정 본인이다. 50여 년간 연기로 쌓은 역사가 있었기에 새 역사도 윤여정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목숨 걸고 했던 연기만큼은 결국 윤여정을 배신하지 않았다. 또한 만인의 선생님으로 대우받고 존경만 받아도 마땅한 상황에서 제자리에 안주할 수 없다는 이유와 배우로서의 욕심으로 미국행을 택한 과감함도 신의 한 수가 됐다. 작은 힘은 큰 영화의 밑거름이 됐다.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에 발을 들인 윤여정은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반세기가 넘는 시간동안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1971년 드라마 '장희빈'과 영화 '화녀'를 동시에 히트시키며 '천재 여배우'로 각광받았고,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넝굴째 굴러온 당신' '디어 마이 프렌즈' 등 크고 작은 역할을 가리지 않으며 수 많은 드라마에서 열일 활동을 펼쳤다. 김수현 작가의 원조 페르소나로 한 손에 꼽기 힘든 대표작이 수두룩하다.
충무로 활약도 빛났다. 리메크판 '하녀'를 비롯해 '바람난 가족' '여배우들' '돈의 맛' '계춘할망' '죽여주는 여자' 등 장르와 캐릭터에 한계를 두지 않는 열연을 선보였다. '미나리'의 순자는 윤여정이 걸어 온 50년 연기인생의 산물이다. 해외 관객들이 매료된 것도, 국내 관객들이 익숙하게 빠져든 것도 윤여정의 내공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기 때문. 과거엔 감히 예상 못했을 결혼 후 10여 년의 미국 생활 고충도 훗날 찬란한 역사를 이룩하는데 꽤나 큰 도움이 됐다.
엄마, 할머니에 국한되지 않은 윤여정의 도전적 행보는 해를 거듭할 수록 눈에 띄었다. 특히 해외에서도 낯설지 않은 호흡으로 윤여정의 능력과 똑부러진 마인드를 새삼 확인케 했다. 2015년 워쇼스키 자매가 감독한 미드 'Sense8'에 비중있는 카메오로 출연하며 해외 활동에 물꼬를 텄고,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 등 나영석 사단 예능에 합류하며 본연의 매력과 함께 영어 실력도 자랑했다. 패셔너블 분위기 또한 윤여정의 전매특허 이미지다.
"믿기 힘들다" 표현했지만 이미 거머쥔 32개의 트로피는 현실을 말한다. 윤여정은 전미 비평가위원회로부터 LA, 워싱턴 DC,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뉴욕 온라인, 그레이터 웨스턴 뉴욕, 오클라호마, 캔자스시티, 세인트루이스, 뮤직시티, 노스캐롤라이나, 노스텍사스, 뉴멕시코, 샌디에이고, 아이오와, 콜럼버스, 사우스이스턴, 밴쿠버, 디트로이트, 디스커싱필름, 미국 흑인, 피닉스, 온라인 여성, 할리우드 비평가협회와 미국 여성 영화기자협회, 팜스프링스 국제 영화제, 골드 리스트 시상식, 선셋 필름 서클 어워즈, 라티노 엔터테인먼트 기자협회 등 연기상만으로 통산 32관왕을 수상하며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아카데미시상식 입성만으로 또 하나의 역사적 한 페이지를 쓴 윤여정은 이제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로 오스카를 노린다.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아시아 배우가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건 지난 93년간 '사요나라'(1957) 우메키 미요시, '모래와 안개의 집'(2003) 쇼레 아그다쉬루, '바벨'(2007) 키쿠치 린코, 그리고 윤여정까지 단 4명이다. 윤여정이 수상까지 성공한다면 우메키 미요시 이후 63년만 두 번째 아시아 여우조연상이 탄생하게 된다.
지난해 '기생충(봉준호 감독)'에 이어 2년 연속 기적의 낭보에 환호하게 만든 '미나리'와 윤여정. 전 국민이 온 마음을 다해 희망하고 있는 순자의 미소와 눈물, 그리고 수상소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