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패배에 대해 벤투 감독에게만 비난이 쏠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 최상의 상태로 경기를 치르도록 완벽하게 지원하지 못한 대한축구협회의 책임이 더욱 크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80번째 한·일전에서 대표팀이 0-3 참패하자 이례적으로 정몽규 회장이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책임'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하지만 '어떻게'가 빠져있다. 핵심이 빠졌으니 지금의 위기를, 국민의 분노를 잠시나마 피하기 위한 말뿐인 책임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달라진 건 있다. 그동안 위기 때마다 감독 뒤에 숨어서 모든 책임을 감독에게만 몰아 넣었던 '그들만의 책임'은 사라졌다. 대신 벤투 감독 감싸기로 바뀐듯 하다. 이 전향적 자세는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런데 오히려 분노를 더 크게 했다. '공식적으로' 축구협회는 벤투 감독에 대한 신뢰를 이어간다고 빠르게 발표한 것이다. 한국 축구 역사에서 한·일전 참패는 감독 경질의 원인으로 작용해 왔다. 10년 전 삿포르 참사 0-3 패배는 조광래 전 감독 경질로 이어진 바 있다. 정몽규 회장은 이 참사 속에서 절대로 "벤투 감독 경질은 없다"고 선수를 친 것이다. 축구 팬들은 벤투에게 신뢰를 계속 보내라는, '강요'와 다름없다.
순서가 틀렸다. 방향도 잘못 잡았다. 감독이 책임질 수 있는 방법은 옷을 벗는게 유일하다. 이를 정몽규 회장이 막았다. 감독의 책임을 축구협회가 대신 가져가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감독을 경질하지 않고도 축구 팬들을 설득할 수 있는, 다른 확실한 방법을 내놔야 한다. 이 책임을 다한 뒤 벤투 감독 재신뢰를 요청하는게 올바른 순서다. 그런데 정몽규 회장이 내놓은 책임은 오히려 불신을 증가시켰다.
그는 "이번 일을 거울삼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 구단과 지도자 등 현장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며 대화하겠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 6월부터 시작될 월드컵 예선에서는 축구팬과 국민 여러분에게 새롭게 달라진 대표팀, 기쁨과 희망을 주는 대표팀이 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축구협회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대표팀 지원과 통솔, 방향 제시는 축구협회의 존재 이유다. 현장의 목소리에는 진작에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동안 직무유기를 했다는 걸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문제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한뒤 사과문을 제시하는게 맞다. 서둘러 사과부터 발표했으니 답은 내놓지 못한다.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면피용으로 읽히는 이유다.
정몽규 회장은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에서 달라질 대표팀이 책임의 핵심인 것 처럼 말했다. 아시아 최강 팀들이 모이는 최종예선도 아니고 2차예선이다. 상대는 북한, 투르크메니스탄, 레바논, 스리랑카. 굳이 달라지지 않아도 무난한 통과가 예상되는 대회다. 울리 슈틸리케 전 감독은 8전 전승으로 마친 예선이다.
2차예선에서 한국이 승승장구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한국이 선전한다면 지금의 비난과 분노가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6월 아시아 2차예선에서는 객관적으로 '달라진 대표팀'을 확인하기 어렵다. 약체와의 승부에서 거둔 승률로 어떤 걸 판단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축구협회가 위기 때마다 꺼낸 옛날 방식, 전형적인 물타기 아닌가.
지금 축구계는 한·일전 참패의 책임을 묻고 있다. 월드컵 2차예선과 연결하기 어렵다. 축구 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의 연속이었던 한·일전에 대한 진정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2차예선과 결부시키는 건 축구협회조차 한·일전의 무게감을 외면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번에 못했으니 다음에 잘하겠다'는 목소리. 이건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다. 축구 팬과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무거운 책임을 약속해야 한다.
백서까진 아니더라도 선수 수급과 준비과정에 대한 어떤 실책과 실기가 있었는지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무리한 한·일전이었다. 이를 추진한 핵심 인사의 징계가 먼저 진행되야 한다. 이어 벤투 감독의 변화를 이끌어낼 확실한 플랜을 제시해야 한다. 중간에서 눈과 귀를 닫으며 조율에 실패한 축구협회 행정력도 제재 대상이다.
어떤 방법으로 책임을 다 할지는 정몽규 회장의 선택에 달렸다. 그의 지도력이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