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노조 반대에 온라인 판로가 막힌 데다 각종 규제로 중고차 시장 진출도 좌초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사이 수입차들은 관련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노조에 막힌 온라인 판매
28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자동차 시장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급속히 넘어가면서 판매방식도 온라인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기아는 여전히 영업사원을 통한 판매만 고집하고 있다. ‘밥그릇’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영업사원들이 극렬히 반대하고 있어서다.
특히 최근 기아가 첫 전용 전기차 'EV6'에 대해 온라인 판매가 아닌 온라인 사전예약을 추진하는데도 판매노조가 반대하고 나섰다.
기아 판매노조는 지난 17일 소식지를 통해 "국내영업본부가 EV6 출시에 앞서 온라인 예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영업현장에 많은 혼란을 초래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확산하고 있다”고 반대의 뜻을 밝혔다.
기아는 30일 EV6의 디지털 월드 프리미어(세계 최초 공개행사)를 진행하고 온라인 사전예약을 순차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온라인 사전예약은 말 그대로 약간의 계약금을 받고 온라인을 통해 사전예약을 받는 것으로, 테슬라가 하는 온라인 판매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사전예약을 한 구매희망자는 실제 차량이 출시된 후 영업사원을 통해 차량을 구매할 수 있다. 기아는 EV6 구매희망자가 온라인을 통해 희망 모델을 선택하고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는 방식으로 사전예약을 진행할 방침이다.
이런 사전예약에 대해 노조가 반대하는 것은 회사가 온라인 사전예약 시행 후 온라인 판매로까지 시스템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노조 측은 “사전 온라인 예약방식 도입은 온라인 판매로 확대돼 영업직군에 심각한 고용 불안을 야기시킬 수 있다고 예상한다”며 “결국 EV6 사전 온라인 예약이 전 차종 온라인 판매를 전제하는 수단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사측은 이에 대해 사전 예약이 단순히 구매 의향이 있는 고객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등록하는 정도에 불과하며, 온라인 판매로 확대할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기아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항은 없지만 사전 예약은 예약금을 지불하고 계약 순번을 받는 정도가 될 것"이라며 "사전계약과 판매는 온라인으로 진행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노조의 반말이 거세자, 현대차와 기아는 해외에서만 온라인 판매를 진행하고 있다.
현대차는 코로나19 이전부터 시범 사업으로 운영하던 온라인 판매 플랫폼 '클릭 투 바이'를 영국·호주·캐나다 등을 비롯해 미국과 인도 전역으로 확대하고 있지만, 국내에는 도입하지 않은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온라인 자동차 판매 플랫폼을 국내에 도입하기에는 영업직 직원들의 반발 등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아 쉽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반면 코로나19 사태와 맞물려 국내외 완성차 브랜드들은 비대면 판매 채널을 본격적으로 확대하는 추세다.
한국GM은 온라인으로 견적 상담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고, 르노삼성차는 지난해 2월 XM3를 출시하며 네이버와 함께 온라인 사전계약 이벤트를 실시하는 등 비대면 영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볼보와 벤츠는 2025년까지 각각 전체 판매의 80%와 25%를 온라인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다.
현대차 10년간 중고차 진출 금지?
현대차그룹의 온라인 판매가 노조에 막혔다면 중고차 사업은 각종 규제에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2019년 2월 '중고차 매매의 생계형 적합업종 보호 기간'이 종료되며 대기업인 현대차도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중고차 판매는 2013년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지정돼 6년간 대기업의 활동이 제한된 바 있다.
2019년 11월에는 동반성장위원회(이하 동반위)가 중고차 매매는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일부 부합하지 않는다는 의견서를 중기부에 제출했다. 시장 규모가 커졌고, 소비자 편익을 고려해 대기업이라는 이유로 시장 진입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취지였다.
이에 현대차는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완성차 업계가 반드시 사업을 해야 한다”고 사업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권을 쥔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는 1년이 지나도록 고심만 거듭하고 있다. 동반위 입장을 받은 날부터 3개월, 연장 시 최대 6개월 이내 생계형 적합업종 여부를 지정 및 고시해야 하지만 심의위원회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장관이 바뀐 중기부 결정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데다 정치권과 업계는 서로 ‘공 떠넘기기’ 행태를 보인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위해 사임한 박영선 전 장관의 바통을 이어받은 권칠승 중기부 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중고차 판매가)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선정되지 않는 경우를 가정해 약자 보호와 상생의 방식들을 중재하는데 현실적인 방안이 아닌가 싶다”고 발언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 논의가 답보 상태에 빠진 가운데 정치권에서는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 10년 금지' 법안까지 발의됐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지난 25일 '소비자 보호 및 중고차 시장 상생협력법안'을 대표 발의했다고 밝혔다. 현대차와 기아, 한국GM 등 국내외 자동차 제조업계의 중고차 시장 진출에는 최소 10년이 필요하다는 게 해당 법안의 골자다.
조 의원은 “세계적으로 완성차 업체가 중고차 시장에 진출한 전례가 없음에도 최근 국내 완성차 업체는 중고차 시장 진입을 시도해 영세한 중고차 매매업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며 “완성차 업체가 중고차 시장에 진입할 경우, 강력한 시장 지배력을 이용해 중장기적으로 소비자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는 현대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법안이다. 법안 통과 시 연간 약 260만대, 매출 규모만 약 20조원에 달하는 중고차 시장 진출이 사실상 막히기 때문이다. 제한 기간 역시 생계형 적합업종(5년)보다 2배 길다.
더욱이 이번 법안에서 수입차 브랜드는 제재 대상에서 제외됐다. 수입차 업체들은 직접 판매 대신 중간 딜러와 함께 중고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입차 업계는 제한 대상을 ‘완성차’로 한정한 이번 법안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법안은 소비자가 외면됐다"며 "이런 법안이 나오면 중고차 시장은 영원히 후진 경영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동반위가 중고차 매매가 생계형 업종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근거는 소비자 피해였다"며 "단순 대기업 진출을 막는다면 중고차 시장에서 소비자 피해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