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33·흥국생명)은 오른손 엄지를 다쳤다. 붕대를 감싸고 경기에 나선다. 그 붕대 위에 짧은 문구를 적었다.
'끝까지 간다.'
김연경이 포스트시즌 직전, 동료들과 상의해 만든 봄 배구 슬로건이다. '끝'이 의미하는 바는 우승이다. 그가 한국 무대에 복귀하면서 밝힌 최우선 목표를 달성하려면, '끝까지 간다'라는 염원이 이뤄져야 한다. 어쩌면 한국 무대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경기, 그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흥국생명은 지난 2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2020~21 도드람 V리그 챔피언결정 2차전에서 정규시즌 우승팀 GS칼텍스에 세트스코어 0-3으로 졌다. 1차전에 이어 두 경기 연속 셧아웃 패배. 5전 3승제로 펼쳐지는 챔프전에서 흥국생명은 한 경기만 져도 정상 등극에 실패하게 된다. 흥국생명도, 김연경도 벼랑 끝에 몰렸다.
'배구 여제'는 11년 만에 V리그에 돌아오면서 세 가지 목표를 공개했다. 통합 우승과 트리플 크라운(서브·블로킹·후위 공격 각각 3개 이상), 그리고 박미희 감독의 말을 잘 듣는 거였다. 단연 최우선 목표는 통합 우승이었다. 정규시즌 막판 흥국생명에 불어닥친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의 학교 폭력 논란으로 팀이 고꾸라지면서 통합 우승은 물 건너갔다. 그러나 끝까지 간다면 챔피언결정전 우승은 이뤄낼 수 있다. 슬로건과 딱 맞아떨어진다.
정규시즌 막판 어려움을 겪은 김연경은 '봄 배구'에서 투혼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 22일 열린 IBK기업은행과의 플레이오프(PO) 2차전 4세트 도중 오른손을 다쳤으나 다시 일어섰다.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은 "여전히 통증이 있지만, 김연경이 경기를 뛰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고 전했다.
김연경은 PO 1차전 29점·성공률 60%, 2차전 20점·46.15%, 3차전 23점·59.46%를 기록했다. 팀 최다 득점 기록은 늘 김연경의 몫이었다.
그런 김연경도 점차 지친 기색이 엿보인다. 하루 건너뛰어 경기를 치러 체력 소모가 엄청나다. 3전 2승제의 PO가 3차전까지 이어지면서 휴식 없이 곧바로 챔프전 일정에 돌입한 여파가 클 수밖에 없다. 김연경은 26일 챔피언결정 1차전에서 59.09%의 높은 성공률을 올렸지만, 득점은 13점에 그쳤다. 28일 2차전은 11점, 성공률 28.57%에 그쳤다. 올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을 통틀어 가장 낮은 공격 성공률이었다.
김연경은 2세트 17-21, 19-23에서 연속 범실을 했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늘 해결사로 활약한 그였지만, 경기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워하는 모습도 보였다.
경기 외적으로 어깨도 무겁다. 김연경은 정규시즌 막판 GS칼텍스에 역전 우승을 내줘 축 처진 팀 분위기를 PO를 통해 가까스로 수습했다. 하지만 챔피언결정전 1~2차전에서 너무 싱겁게 져 부담감이 크다. 박미희 감독은 "책임감이 커서 무게감을 느낄 것 같다. 많이 뛰고 공을 때려서 피곤한 게 아닌 리더로서 여러 생각을 해야 하기에 피로감이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GS칼텍스의 삼각편대(이소영-강소휘-메레타 러츠)는 막강하다. 이에 맞서는 흥국생명은 위태롭다. 외국인 선수 브루나 모라이스는 기복이 심하다. 이재영과 이다영의 공백은 수습할 수 없을 지경이다. 리시브가 흔들리고, 세터와 공격수의 호흡도 원활하지 않다.
결국 많은 부담을 김연경이 안고 있다. 역대 15차례 여자부 포스트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1~2차전을 모두 패한 팀이 3차전을 이긴 적이 없다. 네 번 모두 3연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상황이 녹록지 않지만, 김연경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다. 그는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에서 "한국에서 계속 배구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승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밝혔다. 내년 시즌 거취가 불투명하다. 내년 시즌 김연경이 어느 리그, 또 어떤 팀 유니폼을 입을지 미지수다. 다시 해외로 나갈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우승 의지가 더욱더 크다. PO를 통과한 그는 마지막 우승 문턱을 반드시 넘고 싶어 한다.
어쩌면 국내 무대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김연경의 경기가 30일 열린다. 흥국생명은 이날 오후 7시 홈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펼쳐지는 GS칼텍스와 챔피언결정 3차전에서 반전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