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잉글랜드·스페인·이탈리아 12개 구단에 의해 설립된 유러피언 슈퍼리그로 인해 축구계는 한바탕 난리를 겪었다. 유럽축구연맹(UEFA), 각국 축구협회, 정치권, 선수, 팬들의 거센 저항을 받은 슈퍼리그의 출범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팬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5월 2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퍼드에서는 맨유와 리버풀의 경기가 열릴 예정이었다. 축구장 밖에서 수천 명의 팬이 모여 미국인 구단주인 글레이저 가문에 항의 집회를 열고 있었다. 이 중 일부가 경기장 안으로 진입했고, 맥주병을 던지고 홍염을 터뜨리는 등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에 프리미어리그(EPL) 사무국은 경기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해 경기를 연기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팬들과 비교해 잉글랜드 팬들의 분노는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단단히 화가 나 있다. 무엇이 잉글랜드 팬들을 이렇게 화나게 했을까?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잉글랜드에서 탄생한 현대 축구의 기원을 알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영국에서 축구는 남성 노동자 계급 문화의 초석이었고, 지리적으로는 잉글랜드 북부 공장 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클럽들의 상당수는 맨체스터, 리버풀, 셰필드, 뉴캐슬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산업 공동체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축구는 남성 노동자들의 삶의 일부 혹은 전부였다.
1992년 창설된 프리미어리그(EPL)는 기존의 잉글랜드 축구 산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전 세계 212개국에서 시청하는 거대한 산업이 된 EPL에 막대한 해외자금이 유입된 것이다.
상업적인 성공과 더불어 EPL에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낡은 지역이 새롭게 개발되어 기존의 원주민들은 쫓겨나고 부유한 사람들이 유입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막대한 TV 중계권료와 스폰서십 비용이 유입되면서 EPL 경기장은 더욱더 커지고 최신화되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경기장 티켓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고, 노동자들은 더는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오랫동안 축구장의 주인이었던 노동자들이 사라진 자리는 중산층과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로 대체되었다.
프로 스포츠의 메카인 미국 팬 관점에서 잉글랜드 축구 팬들의 티켓 가격 상승에 대한 불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미식축구리그(NFL)의 2020년 평균 티켓 가격은 105달러(11만8000원)다. 이에 반해 2019년 EPL의 평균 티켓 가격은 NFL의 절반도 안 되는 28.5파운드(4만4000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생활비(cost of living)가 미국보다 평균 6.4%가 높다는 것을 고려하면, 잉글랜드 축구 티켓 가격은 절대 비싸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미국에도 스포츠 티켓 가격 상승에 관해 불평하는 팬들이 있다. 하지만 잉글랜드 축구 팬들의 불만에 비할 바는 아니다. 미국인들 입장에서 축구 티켓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느껴지면, 경기장에 안 가면 그만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티켓 가격은 내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계산법은 미국과 영국(유럽)의 근본적으로 다른 스포츠 시스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
영국(유럽)과 미국에서 클럽이라는 명칭은 의미가 다르다. 미국프로야구(MLB)의 LA 다저스나 NFL의 댈러스 카우보이는 클럽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개인 소유의 프랜차이즈(franchise)다. 따라서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이들은 연고지를 옮길 수도 있다. 미국의 프랜차이즈 팀들은 주요 대도시 지역을 커버할 수 있을 만큼 큰 독점적 영토를 가지고 있다. 즉 이들은 보통 지역 경쟁 상대가 없다.
프랜차이즈 팀은 더 큰 조직(리그)의 일부이다. 리그의 멤버는 정해져 있고, 모든 팀의 투표에 의해서만 새로운 팀을 추가하거나 기존의 팀을 쫓아낼 수 있다. 이들은 리그의 지분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성적과 관계없이 리그에 머문다.
이에 반해 잉글랜드 축구 클럽은 미국의 프랜차이즈 모델과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특정 구단주가 클럽을 소유할 수 있지만, 많은 축구 클럽은 오랫동안 지역 사회에 의해 만들어졌다. 클럽과 지역사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팬들은 클럽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로컬 팬들은 클럽이 자신들을 하찮게 여길 때 화가 날 수밖에 없다.
EPL이 출범한 1992~93시즌 클럽의 가장 큰 수입원은 티켓 판매 등 경기가 열리는 날 얻는 수입(match day income)이었다. 전체 수익의 43%를 차지했다. 하지만 매치 데이 수익은 지난 5년 동안 EPL에서 올린 전체 매출의 12%에 불과하다. 즉 EPL은 경기 중계권료 등으로 이미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고, 티켓 판매는 클럽의 주요 수입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EPL 티켓은 다른 주요 유럽 축구리그보다 훨씬 비싸다.
유럽에서 축구는 전통적으로 노동자 계급(working class)의 스포츠였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서민들은 더는 EPL 축구를 경기장에서 즐길 수 없다. 축구에 대한 애정은 없고 끊임없이 돈에 욕심을 부리는 구단주와 경영인들에게 팬들은 이미 자신들의 클럽을 뺏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러피언 슈퍼리그의 출범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