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총수들은 지분을 통해 경영권을 쥔다. 그리고 지분을 상속받거나 매입해 지배구조 강화를 꾀한다. 총수들의 자사주 매입은 책임경영 강화와 주주가치 제고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계열사 주식을 매각하는 행보를 보이는 총수들도 있다.
2000억원 상속세 위해 울며 겨자 먹기식 매각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달 27일 그룹의 핵심계열사 중 하나인 롯데케미칼 지분 0.26%(9만705주)를 매각했다. 27만7500원의 가격에 블록딜 매각으로 252억원을 확보했다. 이번 매각으로 신 회장의 롯데케미칼 지분은 0%가 됐다.
반면 신 회장의 지분을 전부 매입한 롯데지주의 롯데케미칼 지분은 25.33%에서 25.59%로 높아졌다. 롯데케미칼의 최대주주인 롯데지주는 “롯데케미칼의 최근 실적과 배당 성향을 고려할 때 수익성에 도움이 된다. 지주회사 체제를 안정화하고 계열사의 책임경영 강화를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며 매입 배경을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신 회장이 상속세 마련을 위해 롯데케미칼지분을 청산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고 신격호 명예회장에게 물려받은 유산에 대한 2차 상속세를 오는 7월에 현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롯데 관계자는 본지와 통화에서 “지분 매각은 개인적인 일이라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다만 상속세가 상속 주식뿐 아니라 부동산까지 포함해서 알려진 규모보다 많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신 명예회장에게 롯데지주와 롯데쇼핑,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의 지분을 상속받았다. 이로 인해 롯데지주 11.75%→13.04%, 롯데쇼핑 9.84%→10.23%, 롯데제과 0%→1.87%, 롯데칠성음료 0%→0.54%로 지분율이 상승했다. 신 명예회장의 상속 주식 평가액은 4500여억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중 41.7%의 상속 지분이 신 회장에게 돌아갔다.
전체 주식 상속세는 2700억원에서 신 회장이 부담해야 할 액수는 1100억원 이상이다. 여기에 부동산과 일본의 롯데홀딩스, 광윤사 등 계열사 지분을 모두 더하면 신 회장이 부담해야 할 상속세는 2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 회장은 상속 주식을 세무당국에 담보로 제공하고 5년간 6회 연부연납 방식으로 상속세를 납부할 계획이다.
이에 상속세 납부 때문에 롯데케미칼 지분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매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연봉과 배당금 등으로 천문학적인 상속세를 마련하기 버겁기 때문에 그룹 지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롯데케미칼 지분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신 회장은 지주사 롯데지주의 최대 주주라 롯데케미칼 지분이 없더라도 지배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롯데케미칼은 최근 주가 상승으로 지분 가치가 높아졌다. 1년 전인 2020년 5월 27일 롯데케미칼의 주가는 18만9500원이었다. 1년 새 주가는 46% 이상 뛰면서 신 회장의 지분 가치로 늘었다.
신 회장은 지난달 남대문세무서에 상속세 납부를 위한 담보를 변경했다. 당초 롯데제과·롯데칠성음료·롯데쇼핑 지분을 담보로 맡겼는데, 이를 해지하는 대신 롯데지주 주식을 담보로 전환했다. 신 회장이 상속세 납부를 위해 롯데제과와 롯데칠성음료 지분의 추가적인 매각이 예고되고 있다.
책임경영 강화, 시세 차익 ‘두 마리 토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신동빈 회장과는 반대의 행보를 걷고 있다. 최근 자사주를 매입하며 지분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회장 자리에 올랐지만, 경영 승계를 마무리하고, 순환출자 해소 등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자사주 매입을 통해 책임경영 강화는 물론 시세 차익 효과도 기대되고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주식이 폭락하자 정 회장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식을 대거 매입했다. 정 회장은 406억원을 들여 현대차 지분 0.21%를 끌어올렸다. 또 411억원 규모의 현대모비스 주식도 매입했다. 현대모비스 지분이 없었던 정 회장은 0.32%의 지분을 보유하게 됐다.
현대차 관계자는 정 회장의 주가 매입과 관련해 “주주가치를 제고하고 주가를 방어하는 차원이다”고 설명했다. 정 회장의 의도대로 현대차는 폭락장 속에 주가 방어에 성공했다. 자사주 매입으로 책임경영 강화 측면 등이 부각되면서 현대차의 주가는 큰 폭으로 뛰었다.
정 회장은 투자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당시 그는 현대차는 주당 6만9793원, 현대모비스는 주당 13만5294원에 사들였다. 하지만 현대차의 주가는 2일 종가 기준으로 23만8000원으로 3배 이상 뛰었다. 현대모비스도 28만원으로 2배 이상 올라 지분가치가 배가 됐다.
또 정 회장은 지난해 현대차가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할 때 개인적으로 2389억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 현대차 30%, 현대모비스 20%, 정 회장 20%, 현대글로비스 10% 지분을 확보하는 인수였다. 특히 기업 총수로는 드물게 사재를 털어 인수합병에 투자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보스턴다이내믹스가 미국 상장에 성공하면 정 회장의 지분 가치는 5배 이상 폭등할 수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도 쿠팡의 상장으로 지분 가치가 투자 금액의 6배까지 뛰었다. 업계에서는 정 회장이 과감한 투자로 향후 지배구조 개선과 상속세 납부에 필요한 금액을 미리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한다.
반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경우 2018년 친족들에게 SK 주식 329만주(4.68%)를 증여했다. SK그룹 회장 취임 20년을 맞아 성장의 근간이 되어준 친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9228억4500만원에 달하는 주식을 나눠줬다. 비록 최 회장의 SK 지분율이 22.93%에서 18.29%로 떨어졌지만 오너가의 지배력은 견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