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개막 전 이강철 KT 감독에게는 한 가지 바람이 있었다. 바로 탈삼진 능력을 갖춘 불펜 자원이 더 늘어나는 거였다. 지난해 KT 불펜의 9이닝당 탈삼진은 5.78개로 압도적인 꼴찌. 리그 평균(7.18개)은 물론이고, 9위 키움(6.74개)과의 차이도 작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중위권 수준(6.85개·6위)으로 기록이 향상됐다.
이강철 감독이 가장 흐뭇하게 바라보는 선수는 오른손 투수 박시영(32)이다. 박시영은 8일까지 15경기에 등판해 1승 4홀드 평균자책점 1.13(16이닝 2자책점)를 기록했다. 이닝당 출루허용(WHIP)이 0.69, 피안타율도 0.130으로 수준급이다. 백미는 9이닝당 탈삼진. 10.69개로 팀 내 1위다. 6.23개였던 전년 대비 무려 4.46개가 늘었다. 이강철 감독은 "삼진 잡는 투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역할을 시영이가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확 달라진 바탕에는 슬라이더가 있다. 야구통계전문업체 스포츠투아이에 따르면, 박시영의 지난해 슬라이더 피안타율은 0.333으로 평범했다. 하지만 올 시즌에는 0.074(7일 기준)로 수치가 뚝 떨어졌다. 구사 비율도 23.3%에서 48.4%로 확 올렸다. 1년 전만 하더라도 포심 패스트볼(36.9%)과 포크볼(29%)에 이은 '서드 피치'였지만, 이젠 포심 패스트볼(38.9%)보다 더 많이 던진다. 대신 포크볼 비율(9.4%)을 크게 낮춰 구종을 콤팩트하게 정리했다. 슬라이더 아니면 포심 패스트볼이지만, 타자가 알고도 속는다.
박시영은 "솔직히 슬라이더가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탈삼진이 증가한 비결이 딱히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볼카운트 싸움이 잘 되고 있는 것 같다"고 몸을 낮췄다. 이어 "감독님과 박승민, 홍성용 코치께서 정말 좋은 조언을 많이 해주신다. 감독님과 박 코치님이 '초구 카운트 싸움만 유리하게 가면 구위가 괜찮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2군에 내려가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열심히 훈련했다. 해주신 말씀을 토대로 홍 코치님과도 대화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강철 감독은 현역 시절 통산 152승을 기록한 명투수였다. 이강철 감독은 "박시영의 슬라이더는 종으로 떨어진다. 옆에서 볼 때는 슬라이더인데 (전력 분석원들이) 위에서 볼 때는 직구 느낌이 난다고 하더라. 터널링이 엄청 좋다. 직구 제구까지 된다면 타자가 치기 쉽지 않다"고 슬라이더의 위력을 설명했다.
투수가 공을 던지면 타자가 구종을 분간하는 시점까지 일종의 '터널'을 지나게 된다. 터널이 길수록 구종 판단이 어려워 투수가 유리하다. 반면 터널이 짧으면 타자가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박시영은 올해 슬라이더 구속이 빨라졌는데 감독의 설명대로 터널링까지 더해져 위력이 배가됐다.
그는 도박에 가까울 정도로 투구 레퍼토리를 크게 바꿨다. 최근 두 시즌 평균 12% 정도 차지했던 커브는 이제 거의 던지지 않는다. 그는 "타자들이 타이밍을 못 맞추는 것 같아서 슬라이더를 많이 던지고 있다. 딱히 이유는 없다. 두 가지 구종(포심 패스트볼·슬라이더) 위주로 던지는 것도 어려움이 없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박시영은 이제 KT 불펜의 '믿을맨'으로 자리매김했다.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난 그의 슬라이더가 빛을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