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배구는 도쿄올림픽에서 '즐거운 반란'을 일으켰다. 세터 염혜선(30·KGC인삼공사)은 투혼을 불사르며 대표팀의 4강 진출을 토스, 올림픽에서 '반전 드라마'를 썼다.
대회 직전까지도 여자배구 대표팀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가득했다.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가 학교 폭력 논란으로 이탈했고, 올림픽 전초전 격인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3승 12패로 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도쿄올림픽 4강에 올랐다.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백업'으로 뛰던 염혜선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올림픽이었다.
염혜선은 지난 2월 블로킹 훈련 도중 다쳤다. 그는 "오른 약지 뼈가 돌출되면서 인대가 끊어졌다. 또 손등 골절상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무릎 재활이 전부였던 염혜선은 처음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세터는 손이 생명이다. 또 손의 감각도 중요해 걱정됐다"라고 돌아봤다.
오로지 태극마크를 위해 복귀를 서둘렀다. 의료진의 권유보다 2~3주 먼저 훈련을 시작했다. 손등뼈 골절 때 박아놓은 핀을 제거하면 복귀가 더 미뤄질 수밖에 없어, 핀도 제거하지 않은 손으로 공을 토스했다. 하나도 아닌 손가락 2개가 온전치 않은 상황, 통증을 참고 견뎠다. 염혜선은 "볼을 만지면 안 되는 시기에 조금 일찍 복귀해 처음에는 손이 구부려지지도 않더라"며 "물론 아팠다. 하지만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 5월 말~6월 말)에서 보여주지 못하면 대표팀에 뽑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올림픽을 뛰고 싶어 스스로 '괜찮다'고 주문을 걸며 공을 만졌다"고 회상했다.
염혜선은 부상이 다 낫지 않아 VNL에서 부진했다. 그는 "올림픽 최종 명단에 안 뽑힐 줄 알았다. 혼자 방에서 눈물도 흘렸다. 밖에 나가 혼자 걷고 싶은데, 코로나 탓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주변에서조차 올림픽 출전을 만류했다. 염혜선은 "'그런 몸 상태로 뛸 수 있겠나' '올림픽에서도 다칠 수도 있다' '(각종 비난으로) 또 마음의 상처를 얻는다'는 걱정을 많이 해주셨다. 토스나 블로킹 시 공에 잘못 맞으면 많이 아프긴 했다"고 말했다.
염혜선을 짓누른 부담은 또 있었다. 학교 폭력 논란으로 국가대표 자격이 영구 박탈된 세터 이다영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었다. 염혜선은 "사실 스트레스를 받긴 했다. 하지만 세터는 욕먹는 위치고, 나는 특히 맨날 그랬다"며 "실력을 인정해야 하지 않나. 이 악물고 조금만 더 보여주자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올림픽 출전을 희망한 건 간절함 때문이다. 염혜선은 목포여상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2008년 전체 1순위로 프로에 입단한 기대주였다. 하지만 2016 리우 올림픽 본선에선 벤치만 지켰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 체제에서도 염혜선은 이다영의 백업이었다, 이번에 처음 주전으로 뛰게 됐다. 염혜선은 "정말 힘들게 올림픽 티켓을 땄는데 올림픽에 못 나서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라고 돌아봤다.
염혜선은 도쿄올림픽에서 223개의 세트(토스)를 성공하며 이 부문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서브는 공동 3위(8개)였다.
조별리그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일본을 꺾은 후 염혜선은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았다. 그는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이긴 하다. 하지만 라커룸에 들어갈 때까지 눈물을 흘린 건 처음이었다. 예상을 뒤엎고 8강도 확정했고, 주전으로 뛰며 일본을 처음 꺾은 기쁨이 워낙 컸다"고 돌아봤다.
염혜선은 8강 확정 후 숙소로 돌아와 가족과 통화했다. 그의 부모님은 물론 할머니까지 배구인 출신이다. 장녀(1남 2녀) 염혜선은 가족 중에서 현재 유일하게 배구를 하고 있다. 그는 "어릴 적 손도 작고 팔도 짧은 신체 조건 탓에 초등학교 때 배구를 그만두려 했지만 부모님이 들은 척도 안 하셨다"며 "어릴 땐 잔소리를 많이 하셨는데, 요즘엔 오히려 칭찬이나 응원을 해주신다"고 고마워했다.
그는 "(김)연경 언니는 모두가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리더십을 지녔다. 하나부터 열까지 본받아야 한다. 승부욕은 진짜"라고 인정했다. 또 라바리니 감독에 대해서도 "전술적, 심리적으로 정말 좋았다. 내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해줬다"라고 고마워했다.
염혜선은 그동안 트레이드와 보상 선수로 여러 차례 팀을 옮겼다. 그는 "이번 올림픽을 통해 나의 배구 인생을 돌아보게 됐다"며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는데 참고 견디니까 올림픽에서 4강이라는 대단한 성과까지 경험했다. 앞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한번 해보자'고 다짐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염혜선은 이제 리그에서 새 목표가 생겼다. 그는 "(김연경, 양효진, 김수지 등) 언니들의 마지막 올림픽을 함께 해 영광스러웠고 정말 잊지 못할 것 같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며 "좋은 기운을 KGC인삼공사에서 이어가 V리그에서도 좋은 모습 보여주고 싶다. 8년 만에 세터상(2010~11시즌부터 4년 연속 수상)을 받고 싶다"는 각오를 밝혔다.
프로배구 컵대회 KOVO컵 여자부는 23일 시작한다. 염혜선은 손등뼈의 핀을 곧 제거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