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종태(46)가 '꽃중년의 섹시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최근 종영된 MBC 금토극 '검은 태양'에서 국정원 해외정보국 국장 강필호 역을 소화했다. 선과 악을 오가는 강필호의 이중적인 면모를 섬세하게 표현, 가장 현실성 있는 인물로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김종태의 남다른 슈트핏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상황. 이를 위해 체중 관리 및 식단 관리까지 했다는 그는 "멋있게 봐주셔서 감사하다"라고 수줍게 미소를 머금었다.
※인터뷰①에서 이어집니다.
-줄곧 연극을 해왔는데 정확하게 첫 시작이 그럼 연극인가.
"영화 '양아치어조'(2006)를 가장 먼저 찍었다. 이후 연극 '줄리에게 박수를'이라는 작품으로 무대에 처음 서게 됐다. 사실 그때 상업영화 장편을 같이 하나 하자고 해서 기다리는 작품이 있었는데, 때마침 대학로에서 공연 뭘 하나 한다고 같이 하자고 하더라. 강하게 추천하니까 알겠다고 했고 그렇게 연극과 계속 인연이 닿아 연극을 하게 된 것이다. 연극은 연습도 길고 공연도 길지 않나. 하고 있는데 다음 작품 이거 할 생각 있냐고 물어보니 하고 또 하고 그게 반복돼 연극만 했다. 연극 작업이 워낙 재밌다 보니 매체 쪽으로 움직이기 위해 따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드라마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된 계기는.
"2013년에 우연한 기회로 안판석 감독님의 JTBC 드라마 '세계의 끝'을 하게 됐다. 이후 안판석 감독님이 몇 번 연락을 줬는데 그때마다 공연을 하고 있으니까 그저 안부 차 전화를 주는 줄 알았다. 어떤 선배님에게 말하니 '너 미쳤다'고 하더라. 감독님이 스케줄을 묻는 것인데 감사하고 황송하다고 해야지 왜 그랬냐는 거다. 그럼에도 감독님이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할 때 1인 4역을 소화할 수 있는 기회를 줬고, '내년 가을에 뭐 하나 하자'라고 하길래 스케줄을 어느 정도 비우면 되냐고 물었고 스케줄이 되면 고정으로 가자고 해서 비워뒀다. 그렇게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고정으로 하게 된 것이다. 감독님께 너무 감사했다."
-요즘은 반대로 공연장이 그립겠다.
"소속사가 생기고 제 스케줄이 잡히다 보니 오히려 공연을 못 하는 경우들이 생기고 있다. 우선 12월 2, 3, 4에 짧게 하는 공연이 있다. '검은 태양' 끝나고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하고 있다. 여력만 되면 계속 뭔가 무대와 드라마, 영화를 넘나들며 해보고 싶다. 그게 시너지가 되더라."
-연극배우로서의 삶 힘들지는 않았나.
"제 인생 그래프를 보면 뚜벅뚜벅이다. 급경사가 없다. 경제적인 상황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뚜벅뚜벅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것 같다.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겠지만 연극할 때도 그렇게 힘들거나 고생하지는 않았다."
-인생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뚜벅뚜벅. 한 걸음씩만 가자는 주의다. 어렸을 때 달리기를 정말 못했다. 초등학교 때 운동회를 하면 등수별로 도장 찍어서 공책을 주는데 한 번도 못 받았다. 오래 달리기를 유일하게 잘했다. 얼음 땡 같은 거 술래가 되면 한 명만 노려서 지칠 때까지 쫓아다녔다. 제 삶을 돌아보면 출발은 항상 남들보다 느렸던 것 같다. 하지만 좋아하고 재밌어하면 끝까지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들이 잘한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다."
-혹시 슬럼프는 없었나.
"원래는 가정형편을 생각해서 국립 사범대로 진학했다. 근데 너무 쉽게 진로를 택한 거다. 고민 끝에 연기 쪽으로 진로를 바꿨는데 바꾸자마자 IMF(한국 외환위기)가 터졌다. 부모님이 다 실직하시고 귀향을 했다. 군대 다녀와서 복학을 해야 하는데 돈도 없고. 그때 좀 후회가 됐다. 미래가 너무 암울했다. 그때 부모님께 날 왜 안 말렸냐고 물어보니 아버지가 아들이 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 있는데 경제적으로 밀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해보겠다고 하니 막지 말고 하고 싶다는 거 그냥 놔두자고 했다더라. 실은 아버지가 제가 선생님이 된다는 걸 그 누구보다 기뻐하신 분이었다. 두 아들 몫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과거 배우 생활하면서 (국민대) 교수도 했었다. 두 아들 몫을 하고 있다고,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사실 안정적인 길을 놔두고 모험을 택하기란 쉽지 않다.
"배가 불렀던 거다. 그때는 경기가 좋을 때라 일용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면 삐삐를 임대할 수 있었다. 서울에 와서 구제 청바지를 사고, 한 달 월세가 해결됐던 시기다. 야학을 하면서 아버지, 어머니 세대 검정고시 자원봉사를 했었는데 그분들을 합격시키고 나니 감동의 도가니였는데 그걸 또 할 생각 하니 못하겠더라. 40년을 반복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교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40년 동안 꾸준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자신감이 없었다. 내가 살 세상은 뭘 해서 먹고 살까가 아니라 무엇을 하면서 살까가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뭘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연극이 떠올랐다. 그게 직업이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대학로 가서 보니 연극영화과도 있고, 이곳에서 훈련을 해서 배우가 될 수 있더라. 그래서 고민하다 더 늦기 전에 도전해보자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