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뜨거운 피’는 정우의 이 같은 내레이션으로 막을 내린다. 불태웠던 열정이 재가 된 후, 한때 염원했던 것을 고독하게 손에 쥔 존재. ‘뜨거운 피’를 연출한 천명관 감독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영화의 꿈을 가지고 충무로의 문을 두드렸던 30대, 끝내 감독이 되지 못 하고 소설가가 돼 업계를 떠났다가 예순을 앞두고 ‘뜨거운 피’의 연출을 맡으며 입봉을 했다.
뜨거운 것들이 사라진 후에 꿈을 이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토록 염원했던 영화감독의 꿈을 이룬 지금, 천명관 감독의 마음엔 어떤 파동이 일고 있을까. ‘뜨거운 피’ 개봉을 앞두고 진행한 온라인 인터뷰에서 천 감독과 영화, 그리고 영화란 꿈에 관해 이야기했다. -영화계에 들어온 지 약 30년 만의 입봉이다. “충무로에 처음 들어온 게 30년 전쯤이다. 처음부터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느 순간 감독의 꿈을 품었고, 좌절하고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다 충무로를 떠나 15년여를 소설가로 살았다. 그러다 이렇게 다시 돌아와서 감독으로 데뷔하게 됐다.”
-수십 년 염원하던 꿈을 이뤘다. 기분이 어떤지. “특별한 기분이 들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시간이 너무 흘러서 그런 것 같다. 30대 때는 영화에 대한 열망이 정말 뜨거웠다. 그때 작은 것이라도 이뤘다면, 내 생에 대해 갖는 느낌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60살을 앞두고 감독 데뷔를 하다 보니 그런 느낌이다.”
-소설가로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다른 사람의 소설로 감독 데뷔를 한 이유가 있나. “원작자와 제작자가 나를 믿어줘서 하게 됐다. 원작 소설을 봤는데, 정말 재미있고 매력적이더라. 다른 사람이 하면 아까울 것 같아서 욕심을 냈다.”
-부산 출신이 아닌데 부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만드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사투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데, 그 대사의 뉘앙스를 잘 모르니까 안갯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이게 맞나’ 싶고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그런 면은 상당 부분 배우들에게 의존했다. 나는 큰 틀을 짜는 데 집중했고, 그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배우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인물을 구현하도록 격려했다. 내가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우들이 잘해줬다. 부산 출신 감독이라면 확신을 가지고 했을 텐데, 나는 늘 의심스러웠으니까 그런 면에서 스트레스가 컸다.” -정우가 연기한 박희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캐스팅에 고심했을 것 같다. “정우 뿐 아니라 지승현, 깁갑수, 최무성 등 모든 배우의 연기에 만족한다. ‘결국 이 배우들이 정답이었구나’라는 생각을 시사 때 했다. 물론 희수 역 캐스팅에 고심을 많이 했다. 이 영화는 희수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 ‘OOO의 뜨거운 피’가 될 작품이었다. 박희수를 누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톤 앤드 매너가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본다. 정우가 자신의 개성으로 이 영화를 ‘정우의 뜨거운 피’로 만들어줬다. 정우가 연기한 희수는 곱상하고 얼굴도 작도 눈도 큰 그런 인물이다. 건달이 맞나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인물이 가진 불안이 희수라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정우가 그걸 정말 잘해 줬다. 알코올중독이라 할 만큼 술과 담배에 절어 있고, 마흔이 넘어 오갈 데 없어진 쓸쓸하고 불안한 건달의 초상이 잘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영화 개봉이 2년 정도 밀렸는데. “영화라고 하는 것의 성격과 나라는 인간이 안 맞나 싶을 정도였다. 별생각을 다 했다. (웃음) 그런데 사실 영화라는 게 개봉하기 전까지 계속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서 편집과 후반 작업을계속했다. 음악과 CG 작업도 계속했다. 퇴고의 시간이 길었던 셈이다. 그런 퇴고의 과정이 있어서 영화 완성도가 더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잔인한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더 잔인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게 뭘까 싶었다. 잔인하기만 한 건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하려고 했는데도 잔인하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어쨌든 일부러 잔인한 걸 추구하지는 않았다.”
-영화감독으로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될까. “시사회장에 앉아서 관객처럼 영화를 보다 보니 감독이라고 하는 것이 ‘지난하지만 나름대로 멋진 일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영화 자체가 근사하지는 않더라도 작업 과정은 참 멋지다는 생각이다. 다음에는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물론 다음에 작업을 한다면 또 헤매겠지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