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 중구 명동에 위치한 롯데백화점 샤넬 매장 입구에 들어서자 한 직원이 손바닥만 한 태블릿 PC를 가리켰다. PC에는 '123번'이라는 큼지막한 숫자와 함께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재하는 란이 마련돼 있었다. 주중 한복판인 수요일,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치고는 대기 인원이 너무 많았다. "123번이면 오늘 안에 들어갈 수는 있는 건가. 이제 해외여행도 많이 간다던데 왜 이렇게 대기가 이렇게 긴 것인가. 대체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나"라고 묻자 직원의 기계적인 답이 돌아왔다.
"대기번호가 빠지는 속도는 매번 다르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따라서 언제 들어갈 수 있을지도 예상할 수 없다. 카카오톡으로 호출이 울리면 신분증을 갖고 오시라. 여권이나 주민등록증 등의 실물이 있어야 한다."
직원을 붙잡고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직원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대기 124번, 125번, 126번을 받으려는 이들이 늘어선 탓이었다. 반발하는 기자와 달리 PC 버튼을 익숙하게 누르는 대기자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마치 샤넬 매장에 입성하는데 120번대는 긴 축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듯했다.
이날 대기 126번을 받은 샤넬 매장 방문 대기자는 "이 정도면 별로 많은 것도 아니다. 몇 달 전에는 이것보다 더 많았다. (사람이) 빠지는 속도를 보니 오늘 안에 들어갈 수는 있겠다"고 귀띔했다.
롯데백화점 애비뉴엘 점은 명품의 성지로 통한다. 샤넬 외에도 루이뷔통, 까르띠에, 불가리 등 내로라하는 럭셔리 브랜드가 총집결했다. 그런데 백화점 내 럭셔리 브랜드 매장 중 대기자가 100번대 이상인 곳은 샤넬이 유일했다. 샤넬 매장 맞은편에 위치한 루이뷔통은 대기자가 없었고, 까르띠에와 불가리 역시 30분 내외면 입장이 가능했다. 하루 50명으로 방문 고객을 제한하는 롤렉스를 제외하면 긴 대기를 해야 하는 브랜드는 샤넬 말고는 없는 셈이었다.
국토교통부와 인천공항공사는 8일부터 '국제선 조기 정상화'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해외입국자에 대한 7일 격리의무도 전면 해제된다. 특히 야간시간대 항공기 운항제한도 해제돼 인천공항도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간다.
명품 업계는 '오픈런'이 해외여행 정상화와 함께 사라질 것으로 전망해왔다. 실제로 온라인 포털사이트 내 유명 명품 카페에는 "엔데믹 전환됐는데 아직도 대기해야 하나"라는 내용의 질문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해외여행이 정상화하고 인천공항이 북적여도 샤넬의 오픈런은 여전했다. 평소 샤넬 매장을 자주 찾는다던 고객 A 씨는 "얼마 전 새벽 5시 반에 신세계 본점에 도착했는데 대기자들이 10명가량 있었다"며 "예전에 비하면 줄어들었지만, 오픈런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현재 한국 샤넬 클래식 미디엄 플랩백 가격은 9825달러(1233만원)다. 홍콩(8733달러), 프랑스(9225달러), 일본(9521달러), 미국(9582달러), 스위스(9223달러)와 비교해도 비싸다.
샤넬코리아는 지난해 매출 1조2238억원, 영업이익 2489억원을 기록했다. 코로나19 여파로 면세사업부 매출이 전년 대비 30% 하락했지만 국내 사업부 매출이 37% 증가하면서 전체 실적은 오히려 개선됐다.
업계 관계자는 "2022년 대한민국에서 샤넬은 아무리 비싸도, 4~5시간 이상 대기를 해도, 서비스가 엉망이어도 사고 싶은 브랜드다. 코로나19로 패션업계가 다들 고전하고 있지만, 샤넬만은 다른 세상"이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