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2 KBO리그 키움 히어로즈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에서 키움 김재웅이 8회에 투구하고 있다. 김재웅은 현재 리그에서 가장 강한 불펜이지만 홍원기 키움 감독은 그를 9회가 아닌 8회 마운드에 세운다. 홍 감독은 9회 못지 않게 8회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이버메트릭스(야구 통계학)의 대가 빌 제임스는 과거 '마무리 투수 9회 등판 무용론'을 주장했다. 제임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7회 동점 상황에서 불펜 에이스(마무리 투수)를 사용하는 게 9회 2점 이상 앞선 상황보다 더 낫다"고 했다. 세이브 상황이 아니더라도 위기 때 불펜 에이스를 기용하는 게 승리에 다가가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 통계 전문가답게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7회 동점 상황에서 불펜 에이스를 투입하면 승률이 0.574까지 올라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치가 0.500까지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제임스는 "(세이브 상황인) 3점의 리드를 지켜내기 위해 불펜 에이스를 사용하는 건 (능력이 좋은) 최고 경영진에게 (중요성이 떨어지는) 화재보험 협상을 시키는 것과 같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의 주장은 큰 힘을 받지 못했다. 2003년 미국 메이저리그(MLB)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 운영 수석 고문으로 영입된 제임스는 그해 보스턴이 '집단 마무리'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집단 마무리'는 고정적인 마무리 투수 없이 상황에 따라 불펜 운영을 달리하는 전략인데 '마무리 투수 9회 등판 무용론'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은 불펜 투수들의 부진 속에 시즌을 마치기도 전에 폐기됐다.
올 시즌 KBO리그 키움 히어로즈의 불펜 운영을 보면 불현듯 제임스가 떠오른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불펜 에이스 왼손 김재웅을 9회가 아닌 8회 내세운다. 김재웅의 정규시즌 성적은 6일 기준으로 2승 22홀드 평균자책점 0.70. 리그 89명(최소 30이닝)의 투수 중 평균자책점이 가장 낮다. 피안타율(0.127)과 이닝당 출루허용(WHIP·0.96)을 비롯한 대부분의 투수 지표도 A급. 왼손 타자(피안타율 0.154)와 오른손 타자(0.108)를 가리지 않고 잘 막아낸다. 리그에서 가장 강한 불펜이다.
올 시즌 효과적인 불펜 운영으로 리그 최고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홍원기 키움 감독. 홍 감독은 "가장 강한 불펜을 9회 기용한다"는 통설을 깨고 있다. IS 포토 올 시즌을 앞둔 시점에서 키움의 마무리 투수 자리는 공석이었다. 조상우가 군 복무에 들어가면서 그를 대체할 선수가 필요했다. 개막전 마무리 투수였던 김태훈이 지난 4월 말 충수염(맹장) 수술로 이탈한 뒤에는 혼란이 가중됐다. 뒷문 지기가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 홍원기 감독은 김재웅의 역할을 '8회'로 국한했다. 김재웅에게 9회를 맡기면 마무리 투수 고민을 덜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홍원기 감독은 "데이터의 축적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며 "9회도 물론 중요한데 (한 이닝에 대량 실점하는) '빅이닝'이나 큰 사고가 많이 터지는 게 8회다. 마무리 투수가 경기를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무리 투수까지 가는 투수도 중요하다. 김재웅이 9회까지 가는 흐름을 가장 잘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키움의 8회 불펜 피안타율은 0.295로 리그 1위(평균 0.261)였다. 5회까지 앞선 경기 승률은 0.824로 7위. 경기 막판 승부가 요동쳤다. 마무리 투수가 나오기 전 동점 혹은 역전 위기에 몰린 '하이 레버리지(High Leverage)' 상황이 자주 연출됐다. 홍원기 감독은 "다른 팀들을 보면 '약속의 8회'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나. 오랫동안 코치,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9회 못지않게 8회에 큰일이 많이 벌어졌다"며 "이닝을 가장 담대하고 무난하게 넘길 수 있는 투수가 김재웅이다. 8회가 중요하기 때문에 김재웅을 선택했다"고 강했다.
키움은 "가장 강한 불펜을 9회 기용한다"는 통설을 깨고 있다. 김재웅 덕분에 키움의 8회는 상대 팀이 점수를 뽑기 가장 힘든 이닝이 됐다. 8회의 좋은 분위기가 9회까지 연결돼 불펜이 전체적으로 안정되는 시너지 효과까지 생기고 있다. 키움이 만든 '발상의 전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