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호(36·KT 위즈)는 지난달 30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데이비드 뷰캐넌을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때려냈다. 3회 초 무사 1루에서 컷 패스트볼(커터)을 당겨쳤고, 주자 없이 나선 4회 초에는 체인지업을 밀어 우중간 담장을 넘겼다. 지난 시즌 다승왕(16승)에 오른 뷰캐넌이 연타석 홈런을 허용한 건 KBO리그 데뷔 뒤 처음이었다.
오른손 타자인 박병호는 왼발(이동발)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끌며 타격 타이밍을 잡는다. 투수가 슬라이드 스텝(slide step)으로 투구할 때도 보폭만 조금 좁혀 대응한다. 그러나 이날 뷰캐넌과의 3회 승부에선 평소와 다른 타격 자세로 나섰다. 뷰캐넌의 투구 동작이 시작됐을 때, 왼 발바닥이 투수 쪽으로 보일 만큼 발목을 일자로 틀어 세웠다. 그리고 발가락 끝을 지면에 찍은 뒤 타격했다.
박병호는 "뷰캐넌은 리그에서 퀵 모션(슬라이드 스텝)이 가장 빠른 투수다. 1.0~1.2초 정도 같다. 나는 다리를 끌어서 치는 타자다. 뷰캐넌 투수를 처음 상대한 2020시즌엔 다리를 끌고 있는데 이미 공이 지나가 버리더라. 주자가 있는 상황(퀵 모션 투구)에서 뷰캐넌을 상대하기 위해 변형된 타격을 시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행착오 끝에 완성한 대처법이다. 박병호는 지난 5월 20일, 1회 초 2사 1루에서 뷰캐넌과 승부할 때 왼발을 지면에 찍은 채 공을 기다렸다. 이정후(24·키움 히어로즈)로부터 힌트를 얻은 방법이다. 이정후도 투수의 동작에 맞춰 이동발(좌타자 기준 오른발)을 앞으로 끌면서 타격 타이밍을 잡는다. 이정후는 뷰캐넌을 상대할 때 이 동작의 보폭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오른발을 지면에 고정한 채 준비한다. 박병호도 이 동작을 따라 해본 것.
박병호는 "(이)정후도 (발을) 당겼다가 타격하기 때문에 타이밍을 잡는 노하우에 대해 서로 얘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뷰캐넌이 던지기도 전에 정후가 오른발을 끌어두는 걸 보고, 나도 한 번 시도해봤다"라면서 "나는 정후처럼 안 되더라. 그래서 일단 상대가 투구 동작에 들어가면 왼발을 움직여 대응했다"고 전했다.
'띠동갑 후배' 이정후에게서 배우려는 박병호의 자세가 눈길을 끈다. 두 선수는 지난 4년(2018~2021) 동안 키움에서 한솥밥을 먹은 사이다. 박병호의 KT 이적이 결정됐을 때, 이정후는 SNS(소셜미디어)를 통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현재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어도, 더 좋은 타격을 위해 여전히 교감하고 있다.
박병호는 "이정후는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타자다. 공격·수비·주루를 모두 잘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매년 진화하는 게 가장 놀랍다. 지금도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정체기 없이 또 발전한다. 정후는 KBO리그의 아이콘"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병호와 이정후 모두 더할 나위 없는 시즌을 보내고 있다. 이정후는 타율 0.338(337타수 114안타) 66타점 15홈런를 기록, 이 부문 모두 리그 5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이미 최고로 평가받는 콘택트 능력에 장타력까지 더했다는 평가다. 박병호는 홈런 29개를 때려냈다. 홈런 2위(김현수·19개)에 10개나 앞서 있다. 개인 통산 6번째 홈런왕에 다가섰다.
두 선수는 타율 1위를 노리는 이대호(롯데 자이언츠)와 호세 피렐라(삼성), 평균자책점 1위(1.52) 김광현(SSG 랜더스)과 함께 정규시즌 MVP(최우수선수) 후보로 꼽히고 있다. 현재 페이스가 이어진다면 역대급 경쟁이 펼쳐질 전망이다. 박병호는 "MVP에 대해 언급할 시점은 아직 아니다. 홈런 타이틀 욕심도 내지 않는다"면서도 이정후와의 경쟁에 대해서는 "같은 팀에 있을 때도 그랬고, 내가 키움을 떠난 뒤에도 친분을 유지하면서 서로 응원하는 사이다. (이)정후와 MVP 후보로 함께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며 웃었다.
두 선수는 지난 16일 열린 올스타전 1회 말 명장면을 연출하며 서울 잠실구장을 가득 채운 관중을 열광하게 했다. 2사 1·3루에 나선 박병호가 선발 투수로 나선 양현종(KIA 타이거즈)의 몸쪽 낮은 포심 패스트볼을 걷어 올렸다. 좌중간 펜스를 직격할 것 같은 타구를 이정후가 뛰어올라 잡아내는 호수비를 보여줬다. 이정후는 포효했고, 박병호는 허탈한 듯 웃었다.
26일 수원KT위즈파크에서 열린 KT와 키움전에서도 소속팀 공격을 이끌었다. 박병호가 2-4로 지고 있던 5회 말 동점 투런포를 치며 분위기를 바꿨고, 7회 연타석 홈런까지 치며 기세를 올리자, 이정후는 8회 초 역전 3타점 3루타를 때려내며 이 경기 키움의 승리(스코어 8-7)를 이끌었다.
절친들의 MVP 경쟁은 후반기 KBO리그의 관전포인트가 되고 있다. 이정후가 MVP에 오르면 아버지 이종범(현 LG 트윈스 2군 감독)과 함께 역대 최초 부자(父子) MVP 수상이 달성된다. 박병호가 수상자가 되면 2016년 더스틴 니퍼트를 제치고 역대 최고령(36세) MVP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