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은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다. 사전에 정해진 계획에 의해 경기가 진행되고 승패가 결정된다.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 승패는 큰 의미가 없다. 어떻게 하면 더 멋진 볼거리를 만들어 팬들을 즐겁게 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가치다. 전 세계 최대 프로레슬링 단체인 미국 WWE의 ‘E’도 바로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를 의미한다.
WWE 이벤트는 마치 연극이나 콘서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각본에 의해 진행된다. 매주 방송이 되기 때문에 사랑과 우정, 갈등과 배신 등 주말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펼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WWE에서 직접 레슬링을 하는 선수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프로듀서와 작가다.
선수들은 WWE에서 인정받으려면 레슬링도 잘해야 하지만 연기력도 갖춰야 한다. 오히려 뛰어난 연기력을 갖추고 마이크 워크라고 부르는 언변까지 겸비하면 더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다. 드웨인 존슨이나 존 시나, 데이브 바티스타 등 WWE 프로레슬링 선수 출신이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로 자리매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도 한때 ‘박치기왕’ 김일을 앞세운 프로레슬링이 최고 인기를 누리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프로레슬링은 쇼’ 폭로 이후 인기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오늘날은 몇몇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간신히 명맥을 잇는 수준이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프로레슬링은 급성장하는 스포츠 사업이다. WWE의 지난해 전세계 매출은 무려 11억 달러(1조4324억원)에 이른다. 당기순이익도 1억8000만 달러(2333억원)를 넘어섰다.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돼있는 WWE의 시가 총액은 54억 달러(7조330억원)에 달한다. 얼마 전 ‘불륜 스캔들’로 WWE 회장직에서 물러난 빈스 맥맨은 총 재산이 4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미국 프로레슬링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서커스단처럼 지역 행사장을 떠돌거나 술집 등에서 경기가 열리는 B급 문화로 무시당했다. 미국 밖에서는 프로레슬링이 아메리카 문화의 천박성을 보여주는 분야로 지적받기도 했다.
프로레슬링이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포츠’라는 가면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큰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매주 방송되는 프로레슬링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자 팬들은 더욱 열광했다.
프로레슬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을 누가 보느냐’며 곱지 못한 눈길을 주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요소가 오늘날 프로레슬링을 인기 스포츠 이벤트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WWE의 1년 중 최대 이벤트인 ‘레슬매니아’는 북미미식축구리그(NFL) 결승전인 ‘슈퍼볼’ 등과 더불어 미국 내 최대 스포츠 이벤트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필자가 현장에서 직접 관람했던 2019년 레슬매니아는 미국 뉴욕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렸는데 무려 7만명이 넘는 대관중이 운집했다. 몇 주 뒤 방탄소년단 콘서트가 열리기 전까지 해당 경기장 최다 관중을 기록한 이벤트(미식축구 경기 제외)였다.
대중들은 왜 진짜 스포츠가 아닌 프로레슬링에 열광할까. 세계적인 인문사회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1915~1980)는 자신의 유명 저서인 ‘현대의 신화’에서 당시 B급 문화였던 프로레슬링에 대해 언급해 눈길을 끈다.
바르트는 프로레슬링을 ‘인간 희극’(ComedieHumaine)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레슬링에서 재현되는 고통을 구경하는 것은 고대 연극 주인공들이 연기하는 괴로움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프로레슬링이 설령 조작된 스포츠라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에게 진실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프로레슬링은 비극적인 가면을 온갖 과장된 행동으로 확대해 인간의 고통을 보여준다”며 “프로레슬러들은 현실의 정의나 규칙에서 벗어나 구속이 없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다.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극한지대로 이끌어 관중들의 분노를 끌어낸다”고 말한다.
실제로 프로레슬링에서 펼쳐지는 기술이나 연기는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것들이 많다. 비현실적인 움직임과 스토리를 통해 사람들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불만과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본다면 프로레슬링은 단순히 만만하게 얕잡아볼 만한 콘텐츠가아니다. 프로레슬링을 ‘현대의 신화’라고 부르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