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같은 메이저 대회는 평소 축구에 별 관심 없는 사람까지도 흥분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경기에 앞서 두 나라의 선수들이 일렬로 서고 국가(國歌)가 연주되면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TV 화면은 그라운드의의 선수들, 벤치에 있는 코칭스태프와 환호하는 관중의 모습을 연달아 보여준다.
특히 국가가 연주될 때 그라운드에 있는 11명 선수의 표정을 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선수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결의를 다지기 때문이다. 눈을 감는 선수도 있다. 그에 반해 국가를 힘차게 혹은 나직하게 부르는 선수도 있고, 입을 다문 채 정면을 응시하는 이도 있다. 이렇게 같은 팀 내에서도 국가 연주 때 선수들의 반응은 다르다.
문화나 지역에 따라 선수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잉글랜드, 스웨덴, 덴마크, 독일과 같이 북유럽으로 분류되는 국가 선수들은 주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국가를 따라 부른다.
그에 반해 남유럽 국가 선수들은 열정적으로 국가를 부른다. 비록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이어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이들을 볼 수 없지만, 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축구선수들보다 럭비선수들이 감정을 더 담아 국가를 부른다는 것이다. 격렬한 몸싸움이 중요한 종목의 특성상 럭비는 큰 체구를 가진 선수들이 많다. 이렇게 덩치가 산처럼 크고 약간은 무섭게 생긴 이탈리아 럭비대표 선수들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실제로 우는 선수들도 있다) 감정을 힘껏 담아 국가를 따라 부르는 장관을 럭비 월드컵에서 연출하곤 한다.
같은 라틴계라도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완전히 다르다. 전통의 축구 강국으로 2008 유로, 2010 월드컵, 2012 유로를 연속 제패한 스페인 축구를 좋아하는 국내 팬들도 꽤 많다. 혹시 여러분은 국가가 울려 퍼질 때 스페인 선수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기억하나?
스페인 대표팀의 선수들은 국가 ‘La Marcha Real(왕의 행진곡, The Royal March)‘가 연주될 때 굳은 표정으로 정면만 응시할 뿐, 아무도 이를 따라 부르지 않는다. 벤치에 있는 코칭스태프와 후보 선수들도 입조차 벙긋하지 않는다.
이를 보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2020 유로 준결승전에서 만났다. 당시 국가를 열심히 따라 부르는 이탈리아 선수들에 비해 스페인 선수들의 닫힌 입을 보고, 영국 상원의원 존 테일러는 트위터에 스페인 선수들을 조롱하는 글을 올렸다. 애국심이 없다는 것이다. 선수들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국가는 따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스페인 국가에는 ‘가사’가 없다.
스페인 외에도 3개국이 국가에 가사가 없다.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 독립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와 인구 3만의 소국 산마리노가 바로 그들이다.
1761년 발표된 스페인 국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중 하나다. 당시 제목은 ‘La Marcha Granadera(척탄병 행진곡)’이었다. 근대 유럽 육군에서는 수류탄 던지는 것이 주 임무인 병사를 척탄병이라고 불렀다. 당시 수류탄은 크고 무거워서 이를 멀리 정확히 던지기 위해서 키가 크고 강인한 체격의 척탄병이 필요했다. 후에 척탄병이 사라진 후에도 이 용어는 정예부대의 대명사 같이 쓰인다.
스페인 사람들은 곧 척탄병 행진곡을 ‘왕의 행진곡’이라 부르게 된다. 왕실에서 열린 행사 때 이 곡이 주로 연주됐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가사는 없었다.
1936년 2월 총선거 결과로 공산당과 좌파가 연합한 인민전선 정권이 등장하자, 이에 반대한 우파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킨다. 프랑코의 반정부군은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인민전선 정부군은 소련의 지지를 받았다. 1939년 3월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하면서 스페인 내전을 끝낸 프랑코는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다. 독재자로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던 프랑코는 국가에 가사를 붙였다. 1975년 프랑코는 사망했고, 독재정권 잔재 청산을 이유로 스페인은 국가에서 가사를 없앤다.
한편 2007년 마드리드는 2016 하계올림픽 개최지 후보로 나서게 된다. 이에 스페인올림픽조직위원회는 국가에 가사가 필요하다고 느껴 전국적인 공모전을 통해 가사를 선정한 적도 있다. 하지만 여론의 강한 비판에 새 가사는 곧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은 공용어인 스페인어 외에도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를 쓰는 이들도 꽤 많다. 이렇게 지역색이 강하고 분리주의 운동도 종종 일어나는 스페인에서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는 가사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국가에 가사가 없는 것을 선호한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스페인은 E조에 속해 있다. 독일, 코스타리카와 일본이 이곳에 있어 국내 팬들의 많은 관심을 받는 조이기도 하다. 스페인 선수들은 이번 월드컵에도 국가 연주 때 조용히 있겠지만, 이 글을 읽은 독자분들은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들의 침묵은 애국심이 없거나 귀찮은 게 아니라, 단지 국가에 가사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