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런 빌런은 없었다. 악역인데 또 보다 보니 수긍이 갔다. 배우 엄지원이 묵직한 여운을 선사했다. 지난 9일 막을 내린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끊임없는 반전과 충격적인 사건들로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을 12회 내내 이어갔다. 그 중심엔 단연 빌런 ‘끝판왕’ 엄지원이 있었다. 엄지원이 연기한 원상아는 극 중 딸(전채은 분)에게는 누구보다 자상한 어머니로, 남편 박재상(엄기준 분)과는 애증의 관계를 보였다. 그러면서 마치 연극처럼 자신이 짠 시나리오에서 인물을 없애듯 사람을 처단하며 똘아이급 악역으로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엄지원은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강력하고 신선한 캐릭터를 완성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딸을 향한 삐뚤어진 모성애까지 소화했다. 물론 이런 연기는 엄지원이라 가능했다. 엄지원은 힘든 내색보다 촬영에 임하는 내내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처럼 즐겁고 행복했단다. -종영 소감이 궁금한데. “지난 3월 촬영을 시작해 6개월 동안 120회차의 시간을 원상아라는 인물과 함께 보냈다.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여러 얼굴과 마음을 가진 상아를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 너무 좋은 글을 쓴 정서경 작가, 두 말이 필요 없는 연출력의 김희원 PD에게 감사드린다. 좋은 글과 연출 덕분에 상아를, 그리고 찾아가는 여정이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처럼 즐겁고 행복했다. 애정을 담아 촬영한 감독님, 조명 감독님, 모든 세트가 감동이었던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준 미술감독님 까지 이 분들 덕에 상아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작품의 완성은 드라마를 봐주신 시청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나 또한 ‘작은 아씨들’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어 행복했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나. “대본을 처음 받고 4회까지 후루룩 읽었다. 일단 대본이 너무 재미있었다. 상아가 초반 분량이 많지 않다. 1~2회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분량이 많지 않지만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작가님도 평소에 너무 좋아해서 참여하고 싶었다. 내가 상아를 맡으면 ‘다양하게 그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5회 이후로 완전히 다른 상아의 모습들이 나오면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을 놓쳤으면 아쉬웠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다음 작품은 악역이나 사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상아가 미스터리한 내면이 있는 사람이라 시작했다. 롤을 세분화했을 때 악역이라면 악역이지만 ‘빌런’에 가까운 다면적인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원상아는 어떤 인물로 해석했나. “정서경 작가가 ‘지원 씨가 상아의 마음 구조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배우인 것 같았다’고 하더라. 극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상아의 감정과 마음을 잘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과거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들로 삐뚤어지게 되면서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감정과 사고를 가지게 됐다. 하지만 인물이 가진 태생적으로 가진 순수함, 사랑스러움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연기에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외적으로 상아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재미있던 부분은 의상이었다. 미술팀에도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세트가 너무 좋았고, 인물들에게 특정 컬러를 지정했다. 상아는 블루와 보라 정도의 느낌의 컬러를 얘기했다. 이를 토대로 스타일리스트 팀과 발전시켰다. 옷은 가능한 색에 맞추고 하이 쥬얼리로 캐릭터의 고급스러움을 유지했다. 인물을 어떻게 준비하기보다 글을 통해 들여다보고 이해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글이 너무 잘 쓰여 있어서 특별한 노력 없이도 스펀지처럼 잘 흡수되었던 인물이었다. 어투 안에 있던 상아의 마음 구조를 찾아가는 것도 재밌었고 좋았다.”
-촬영을 마치고 후폭풍은 없었나. “유독 이번 작품에서 감정이 센 장면들이 많았다. 촬영 종료 후 내상을 입지는 않았다. 배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캐릭터를 빨리 떠나 보내는 것에 단련이 됐다. 연애가 끝나면 그 사람을 보내주는 것처럼 건강한 배우가 되기 위해 빨리 보내주는 걸 훈련도, 노력도 많이 했다. 그게 인간 엄지원에게도 좋다. 촬영이 끝나고 여러 취미 생활, 운동도 많이 하면서 캐릭터 떠나보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인상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전체적으로 신경 썼던 장면은 8회였다. 상아의 터닝포인트이라 많은 신경을 썼다. 촬영 당시 편도염에 심하게 걸려 몸이 아팠다. 상아에게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었는데 급하게 병원에 갔고, 약을 먹고 프로폴리스 캔디를 먹는 등 좋지 않았던 컨디션에 힘들게 찍어서 특히 아쉬움이 남는다. 또 11회에 재상을 죽이고 ‘당신은 왜 나랑 결혼했어. 난 당신을 위해 안 죽을 건데’라며 이별하는 장면도 가장 마음 아팠던 신이다. 이 장면을 보고 8회 초반 닫힌 방에서 나온 상아가 재상에게 ‘약속해줘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켜 준다는 거’라고 말하며 재상의 약속을 받아낸 이면적인 모습이 나왔다. 너무 무섭기도 아프기도 해서 기억에 남는다.”
-배우들과 호흡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김)고은이와 연기할 때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박)지후도 너무 좋았다. 딸 (박)효린이를 연기한 전채은은 투명하게 연기해줬다. 전채은이라는 사람이 굉장히 맑고 선한데 진심으로 상아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오롯이 마음에 와 닿았다. 엄기준은 워낙 베테랑이라 믿고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심지어 모든 스태프들까지 각자 자기 분야의 프로들끼리 만나서 모두 너무 일을 잘해서 만드는 즐거움이 있었던 현장이었다.”
-시청자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가장 감사한 마음을 보내고 싶다. 대중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 작품을 만드는 이들끼리 아무리 즐겁고 좋아도 드라마를 공감해주는 시청자들이 많을 때 보람을 느낀다. 이번 작품은 특히 많은 시청자들이 사랑해 주셔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미운 상아를 미워할 수 없게 봐주셔 감사하다. 잘 쉬고 몸 컨디션을 잘 회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반할만한 작품으로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인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