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어떻게 발전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재밌게 놀 생각입니다.”
한때 프로레슬링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적어도 1960~70년대에는 그랬다. ‘박치기왕’ 김일이 거구의 외국 선수들을 박치기로 쓰러뜨리는 모습에 다들 열광했다. 동시에 힘겨웠던 삶의 무게를 이겨내는 데 프로레슬링은 큰 힘이 됐다.
하지만 1980년대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프로레슬링은 빠르게 쇠퇴했다. 안 그래도 ‘레슬링 쇼’ 논란으로 큰 몸살을 겪었던 프로레슬링이었다. 야구, 축구 등 구기 스포츠 프로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국민들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김일이 2006년 지병으로 별세한 뒤 프로레슬링은 그의 수제자였던 이왕표가 2010년대까지 명맥을 이었다. 이왕표는 몰락하는 프로레슬링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2018년 담낭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한국에서 프로레슬링 시대는 저무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 프로레슬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수만 명의 팬이 모이는 으리으리한 대회를 열지는 못해도 어디에선가 선수들은 몸을 던지고 팬들은 환호를 보낸다.
지난달 30일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올스타디움이라는 곳에서 ‘AKW 더 인베이전’이라는 대회가 열렸다. AKW는 ‘전한국프로레슬링(ALL-KOREA WRESTLING)’의 약자다. 2021년 4월 공식 출범한 뒤 올해 4월 첫 대회에 이어 두 번째 대회를 개최했다. 공연기획홍보 전문가이자 열혈 레슬링 팬인 이해동(35·활동명 헤이든) 씨와 미국 출신 베테랑 프로레슬러 브라이언 레오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그냥 보더라도 대회는 초라하다. 헬스와 격투기를 겸업하는 체육관에 150~200명 정도 관중이 찾아와 경기를 관전했다. 물론 이들은 열렬한 마니아들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메이저 단체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은 열리고 있었다. 미국 WWE에서나 볼 법한 사다리나 테이블, 철제의자를 이용한 공격도 펼쳐졌다. 심지어 압정이 링 바닥에 깔린 가운데 그 위로 선수가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장면도 연출됐다.
현재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을 산업이라 표현하기 어렵다. 선수들이 프로레슬링으로 먹고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들 평소에는 본업에 열중한 뒤 틈틈이 시간을 내 프로레슬링을 연습하고 대회를 준비한다. 현재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을 제대로 훈련받고 경기를 소화할 수 있는 선수는 대략 20명 정도라고 한다. 대회를 개최하고 단체를 이끄는 헤이든 대표에게 물었다. 왜 한국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프로레슬링을 하는지. 공연 기획과 연출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그냥 제가 좋아하니까 막연하게 한번 해보자 생각했죠. 그동안 연국, 뮤지컬 등을 준비하면서 프로레슬링도 잘 만들면 재밌는 콘텐츠가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되더라구요. 많지는 않지만, 어느 분야보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팬층도 있어요.”
헤이든 대표는 AKW 프로레슬링을 철저히 콘텐츠 비즈니스 측면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프로레슬링이 각본에 의한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 그렇다면 아예 더 재밌게 만들어 확실한 볼거리를 주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는 WWE의 방향과도 일치한다.
“저희는 프로레슬러들을 단순히 선수가 아닌 아티스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우리 콘텐츠를 오프라인(경기장)은 물론 온라인(유튜브, SNS)으로도 빛내주는 아티스트입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재밌게 만들어 보여주자’라는 생각으로 함께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심지어 재밌는 콘텐츠를 위해 헤이든 대표는 자신의 실제 결혼식까지 이용했다. 결혼식이 한창 진행 중인데 악역 프로레슬러들이 방해하기 위해 난입한 것. 헤이든 대표 말에 따르면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은 물론 아내조차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다고 한다. 그 장면은 AKW 유튜브 영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내에게 허락은 받았나’라고 질문하자 헤이든 대표는 “제가 아내한테 계속 잘해야죠”라며 고개 숙였다.
아직은 초보 단계다. 여전히 프로레슬링에 대한 편견은 흥행에 큰 걸림돌이다. 미국, 일본의 메이저 단체와 비교되는 점도 부담스럽다. 그래도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조금씩 앞으로 가려고 한다.
“거창한 목표를 세우거나, 큰 성공을 바라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재밌게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치고 아이디어를 모으면서 조금씩 반응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제발 프로레슬링을 살려주세요’라고 부탁하지 않습니다. 대신 ‘재밌으면 팬들이 보러온다’는 믿음을 갖고 새로운 콘텐츠를 열심히 만들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