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권상우에겐 그야말로 소처럼 일했던 한 해였다. 1월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로 한국 영화의 문을 활짝 열었고 9월엔 희망퇴직, 주식 폭락, 집값 폭등 등 크나큰 위기를 맞은 위기의 아저씨 이야기를 그린 웨이브 드라마 ‘위기의 X’로 OTT 작품에 도전했다.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권상우와 만났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 영화 ‘스위치’의 개봉을 앞두고 그는 홍보 활동에 한창이다. 현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권상우는 내년에도 소처럼 일할 계획. 이에 걸맞게 내년 1월 1일부터 ‘스위치’ 무대인사가 잡혀 있다. 주인공으로 작품에 임하는 게 당연했던 건 과거. 이제 그는 열린 마음으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부지런한 스타일로 아는데 오늘 뭔가 피곤해 보인다. “사실 어제 온종일 수중 촬영을 했다. 디즈니+ 새 시리즈 ‘한강’ 촬영이 있었다. 너무 피곤했는지 오늘 좀 늦게 일어났다. 심지어 담이 결려서 주사까지 맞고 온 참이다.”
-‘스위치’ 개봉 앞두고 있는데 컨디션 관리해야겠다. “평소엔 이렇지 않다. 주사 맞았으니 나아지겠지. (웃음) ‘스위치’는 재미있고 즐겁게 촬영한 작품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촬영이었다. 내가 선호하는, 나와 잘어울리는 장르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인해 개봉이 늦어지다 보니 기대했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덤덤해졌다. 계속 차분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스위치’는 어떤 이유로 선택하게 됐나.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도 내 영역 밖의 책이면 욕심나도 선택을 안 한다는 게 내 원칙이다. 그런데 박강은 나 말고 누가 더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도 자신이 있었다. 정말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더라. 감동과 웃음이 있고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가 최고의 영화인 것 같다. ‘스위치’가 그렇다. 나중에 우리 아들, 딸한테도 보여줄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이 보면 사랑을 느낄 것 같다.” -이민정과 부부로 호흡을 맞췄다. “이민정은 워낙 유쾌한 배우다. 여장부 같은 기질도 있다. 재미있게 찍었다.”
-이민정이 남편 이병헌에게 ‘스위치’ 대본을 보여줬다고 들었다. “사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이병헌 형, 또 다른 지인들과 같이 저녁을 했다. 아마 ‘스위치’ 시사에도 올 것이다. 물론 나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웃음) 처음에는 대본을 보고 형이 ‘이거 너무 권상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영화 아니냐’고 했다더라. 그런데 영화 잘나왔다는 말 듣고 궁금해한다고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배우 가운데 한 명이니까 우리 영화를 어떻게 볼지 나도 궁금하다. 시사회 와주시는 게 기대된다.” -‘스위치’에서 연기한 박강은 톱스타다. 기시감이 드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과장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영화 속에 묘사된 내용이 실제와 전혀 다르지는 않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으니까 나도 짜증 날 때가 있고, 어떤 매니저에게는 박강처럼 보이기도 했을 거다. 그게 인간이 사는 자연스러운 형태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까지 비인간적이진 않겠지만. (웃음) 어쨌든 관객들이 보셨을 때도 과장된 면은 있지만 있을 법하다고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권상우가 바라본 박강은 어떤 사람이었나. “불쌍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남들이 볼 때는 유명한 배우겠지만, 외로운 순간들이 이따금 있다. 하루 쉬다 보면 아침에 운동한 뒤에 차 타고 돌아다니면서 뭐 먹을지를 고민한다. 그런데 또 어디 들어가려고 하면 혼자 가기가 그래서 그냥 몇 바퀴를 돌다 집에 가서 라면 끓여 먹는다. 그리곤 혼자 TV를 본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박강도 화려한 삶을 사는 톱스타지만 공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저 사람 외로워서 저러네’ 싶은 순간들이 영화 속에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쓸쓸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박강이미워 보이지 않았다. 연기하면서 충분히 그 인물에게 공감했다.”
-애드리브도 많았다고 들었다. “커피가 뜨거워서 찬물 섞는 거나 촬영장에서 골프 연습하는 장면 등이 다 애드리브였다.” -‘슬픈연가’ 속소라게 패러디 장면으로도 화제가 되고 있다. “사실 찍을 때만 해도 그 장면이 진짜 웃길까 싶었다. 촬영하면서도 편집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시사 때 관객들이 그 장면에서 많이 웃었다고 하더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위치’에서 패러디됐으면 좋았겠다 하는 다른 과거 출연작, 장면이 있나. “‘천국의 계단’ 속 부메랑 신이 나왔어도 웃겼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천국의 계단’이 내년이면 방영 20주년을 맞는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천국의 계단’ 후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면 어떨까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천국의 계단’에서 내가 연기한 차성주라는 인물이 내 나이쯤 됐을 때는 어떤 삶을 살지 궁금하기도 하다.”
-‘천국의 계단’ 편집본이 유튜브에서 인기를 끌었다. 봤는지. “봤다. 재미있긴 하던데 왠지 그렇게 편집된 거로는 보기가 힘들어서 끊어서 봤다. ‘천국의 계단’ 이야기를 하니 생각이 났는데, 그때 롯데월드에서 촬영을 하고 롯데월드 평생 무료 이용권을 받았다. 아마 지금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걸 지금 들고 가도 무료 이용을 시켜줄까 궁금해졌다. (웃음)” -그렇게 과거 출연작이 계속 회자되는 것이 어떤가. “당연히 감사하다. 그렇게 오래전 작품을 계속 사람들이 리마인드를 해주는 배우가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렇지 많지 않은 것 같다. 행운이라고 본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를 텐데, 그런 기회를 통해 그들에게 내가 누군지 알려줄 수도 있지 않나.”
-‘위기의 X’도 그렇고 ‘스위치’도 그렇고 요즘 코믹 연기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정말로 ‘위기의 X’, ‘스위치’를 비롯해 몇 작품을 찍으면서 너무 재미있었다. 댓글을 보니 ‘권상우 요즘 너무 코믹으로 가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던데, 그 부분에 대한 계획도 나름대로는 가지고 있다. 내년에 있는 어느 작품부터는 다른 면을 좀 보여드려야겠다 싶기도 하다. 그래도 코미디는 내가 너무 재미있어 하고 잘할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꼭 갖고 가고 싶다. 나는 웃기는 게 즐겁다. 사실 코미디가 되게 어려운 장르잖나. 사람을 웃긴다는 건 어렵다. 하지만 코미디 영화라고 하면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스위치’를 통해 그걸 깨고 싶다.”
-대중이 권상우에게 기대하는 바를 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게 뭘까는 늘 생각한다. 그 시점이 정확히 ‘탐정’인 것 같다. ‘탐정’ 이후에 사람들이 나를 조금 더 편안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내가 또 그런 것에 재미를 더 느꼈다. 내가 망가질수록 관객들이 더 즐거워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다. 다만 성과적으로 아직 확연한 만족을 느끼지 못 해서 조금 더 많은 분에게 사랑받는 작품도 하고 싶다. 그러고 나면 연기 변신도 보여드리고 싶고. 사실 내가 계속 몸 관리를 하고 체력도 유지하는 이유는 나의 또 다른 면을 보여드리고 싶어서다. 액션, 코미디, 멜로까지 여러 작품을 통해 다양한 면을 보여드리고 싶다.” -요즘 어떤 순간이 제일 즐거운지. “필드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다. 현장 의자에 앉아서 다음 장면 촬영을 준비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쉴 때는 뭘 하나. “요즘은 좀 바빠서 매일은 못 하지만, 그래도 운동을 일주일에 하루 이틀 꼭 한다. 정말 쉬는 기간에는 주 5일 웨이트를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유연성이 떨어지는 느낌이라 내년에는 스트레칭도 하려고 한다. 또 반신욕을 좋아한다. 너무 좋아해서 어떤 날은 하루에 세 번 하기도 한다. (웃음) 어떻게 보면 반신욕이 내 취미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나. “예전에는 당연히 내가 주인공인 작품만 하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난 1월 개봉했던 ‘해적: 도깨비 깃발’도 그렇고 KBS2 드라마 ‘커튼콜’ 특별 출연도 보면 내 생각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나에 대한 자신감일 수도 있고 변해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당연히 내 이름이 메인 타이틀로 올라가는 작품을 잘하는 게 지금도 1번 목표지만, 정말 좋은 작품이고 임팩트가 있는 캐릭터라면 가리지 않고 하겠다는 마음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잘 흘러가고 싶다.”
-‘스위치’가 내년 한국 영화 첫 개봉작이다. 관객들에게 한 마디.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뚫고 개봉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잘 통한다면 좋을 일이 생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즐겁고 해피한 가족 영화기 때문에 영화가 잘돼서 연초부터 관객들에게 해피바이러스를 선사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