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아이스댄스의 임해나(19)-예콴(22)은 2022~23시즌 국제빙상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한국을 대표해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두 차례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에 참가해 금메달, 은메달을 따냈다. 지난달 12월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피겨 역사상 아이스댄스의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와 파이널 입상은 이들이 최초다.
그러나 임해나와 예콴은 현재 대한빙상경기연맹(이하 빙상연맹)이 선발해 관리하는 국가대표팀에 포함돼 있지 않다. 지난해 2월 17일 빙상연맹이 홈페이지 공지사항으로 알린 2022~23시즌 대표 선발기준 공시를 보면 아이스댄스 대표는 ‘0명’으로 표시돼 있다. 현재 빙상연맹이 피겨 국가대표로 등록한 선수는 남자 싱글 4명, 여자 싱글 8명 등 12명이 전부다. 이는 지난해 11월 3일 발표한 2023~24시즌 대표 공시 역시 마찬가지다.
임해나-예콴의 한국 코치진 중 한명인 김완 코치는 지난 2일 훈련장에서 만나 “임해나-예콴이 국제대회에는 한국팀으로 나가지만, 공식적으로는 한국 대표가 아니다. 국가대표 자격증명서도 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이 이처럼 애매한 상황에 놓인 건 아이스댄스의 특수성 탓도 있다. 국제빙상연맹(ISU)이 주관하는 대회에서 아이스댄스에 출전하는 팀은 선수 두 명 중 한 명의 국적으로 팀을 꾸릴 수 있다. 캐나다 교포 임해나가 한국과 캐나다 이중국적자라서 한국팀으로 출전이 가능하다. 예콴은 중국계 캐나다인이다.
빙상연맹 국제훈련부의 실무자는 “ISU 대회에 한국팀으로 출전하는 것과 연맹이 지원하는 강화훈련에 참가하는 국가대표의 개념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임해나-예콴이 한국팀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는 있지만, 한국에서 훈련하는 선수들이 아니라서 강화훈련 참가 자격이 있는 국가대표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 이 관계자는 “예콴은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대표가 될 수 없다. 2018 평창올림픽 아이스댄스 한국 대표였던 민유라-알렉산더 겜린 조의 겜린도 먼저 귀화를 하고 대표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해나와 예콴은 2026 밀라노-코르티나 담페조 동계올림픽 출전이 목표다. ISU 대회와 달리 IOC가 주관하는 올림픽은 아이스댄스팀의 두 선수가 국적이 같아야 한다. 예콴은 특별귀화를 통해 태극마크를 달고 싶어한다.
지금까지 스포츠에서 특별귀화를 통해 한국 대표가 된 선수들은 대표팀 감독의 강력한 요청 혹은 해당 연맹(협회)의 적극적인 관심이 먼저 있었고, 그 뒤에 귀화 절차를 진행했다. 연맹의 추천서를 먼저 받고, 이를 문화체육관광부에 제출하는 과정으로 특별귀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임해나-예콴 측은 아직 빙상연맹을 통해 특별귀화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해 초조한 상황인데다 공식적으로는 한국 대표라는 자격 증명조차 할 수 없어 답답하다고 호소한다. 반면 빙상연맹 실무자는 “예콴 선수가 특별귀화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만 답했다.
한국 피겨는 김연아의 2010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 이후 천천히 저변을 넓히고 발전해가고 있다. 남녀 싱글 외에도 페어, 아이스댄스, 단체전까지 전종목에 참가한다는 건 피겨 강국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데도 굳이 페어와 아이스댄스는 ‘대표 선수 0명’이라고 못박아둔 건 스스로 발전을 막겠다는 뜻이다.
페어와 아이스댄스 대표를 선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빙상연맹 실무자는 “싱글에서는 몇 백 명의 선수가 경쟁해서 12명만 뽑히는데 저변이 얇은 페어와 아이스댄스는 한두 팀이 경쟁해서 대표를 선발하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답했다. 또 “페어와 아이스댄스는 팀이 깨지는 경우가 많아서 위험성도 있다. 좀 더 지켜봐야 하지 않나 싶다”고 했다.
빙상연맹은 과거 쇼트트랙에서 안현수, 임효준 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외국으로 귀화해버리는 ‘인재 유출’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번엔 빙상연맹의 투자가 전혀 없이 해외에서 성장한 선수들이 ‘한국 대표가 되고 싶다’고 나섰는데 여기에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아이스댄스의 특수성을 고려해 외국인 선수도 연맹이 인정하는 대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듯한데, 여기까지 생각하기 전에 아직 아이스댄스 대표 TO조차 없다는 게 걸림돌이다. 이에 대해 빙상연맹 실무자는 “피겨 국가대표 TO를 (아이스댄스와 페어까지) 늘리는 부분은 결정권을 가진 분들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그 부분에 대한 계획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임해나-예콴은 명문 피겨 클럽인 몬트리올 아이스 아카데미 소속으로 훈련 중이다. 이 클럽에는 전세계 아이스댄스 톱 랭커들이 대거 소속됐다. 여기서 세계 수준의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는 것만으로도 주니어팀인 임해나-예콴의 기량 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
한국에서는 불모지인 아이스댄스에 관심과 투자가 전혀 없었는데도 개인적으로 투자하고 훈련한 세계 수준의 유망주들이 ‘한국 대표가 되겠다’고 나선 것은 한국 피겨 입장에선 사실상 복권 당첨과도 같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빙상연맹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투자할 움직임이 전혀 없어 보인다.
빙상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윤홍근 제네시스 BBQ 회장은 지난해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에게 평생 치킨 쿠폰을 지급하는 ‘치킨 연금’을 준다고 공언하면서 큰 홍보 효과를 봤다. 임해나-예콴이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 키스앤드크라이존에서 점수를 기다릴 때 이들은 빙상연맹 스폰서사인 BBQ치킨 로고가 새겨진 점퍼를 입는다. 이들의 호성적으로 한국은 다음 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아이스댄스 부문 참가 티켓이 늘어날 것이 확실시된다. 그런데도 이들은 공식적으로 한국 국가대표는 아니다.
임해나 측은 “임해나-예콴은 다음 시즌 시니어로 올라간다. 힘든 경쟁을 시작해야 하고, 피겨에서는 시니어에서 흔들리는 선수들도 많다. 한국 대표로 못 뛰는게 아닌가 하는 불안 요소가 없었으면 좋겠다”며 빙상연맹에 바라는 건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