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엄마’ 나문희에게도 쉽지 않은 연기였다. 아들 안중근에게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는 편지를 써 보냈던 조마리아 여사의 심경을 표현하는 것 말이다.
“내가 갖고 있는 힘으로, 내 연기로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어요.”
한국 뮤지컬 영화로 첫 200만 관객을 돌파한 ‘영웅’의 나문희를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했다. ‘영웅’은 안중근(정성화 분)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담은 영화다. 나문희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를 연기했다.
“사실이라고 하는데도 실감이 되지 않는 거예요. 엄마에게는 자식이 10살이든 50살이든 그냥 자식일 뿐이거든요. 자기 아이에 대한 마음은 진짜 기가 막힐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조마리아 여사는 자기 아들이지만 의병대장으로 보고 ‘일본군하고 끝까지 싸워라. 목숨을 바치라’고 하잖아요. 나라를 위해서 자식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는 게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 심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말도 잘 떠오르지 않네요.”
많은 이들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알지만 안중근 의사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영화 ‘영웅’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둘러싼 전후의 이야기를 짚음으로써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동지였던, 인간 안중근의 면면을 세심하게 보여준다. 나문희는 “정성화는 처음부터 그냥 ‘어머니, 어머니’ 하며 따르더라. 내가 실제 정성화 어머니보다는 조금 늙었는데, 그냥 현장에선 내 자식처럼 느껴졌다”고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던 건 아니에요. 그래도 촬영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죠. 머리에 쪽도 지고. 내가 나이도 있는데, 그 장면이 굉장히 어려운 신이거든요. 그걸 촬영 시간 내에 노래도 라이브로 소화하면서 해내야했다는 게 힘들었죠. 막상 영화가 개봉하고 보니 큰 보람이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고요.”
윤제균 감독은 영화 ‘영웅’에 공연과 같은 현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무려 70% 가량을 현장에서 녹음하는 도전을 했다. 나문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제균 감독이 인터뷰에서 ‘나문희 배우가 더 좋은 장면을 위해 테이크를 더 가자고 했다’더라”는 말에 나문희는 “내가 여러 번 가자고 했던 건 생각이 하나도 안 난다. 나는 맨 처음에 한 연기를 제일 좋아하는 편인데 감독님이 그렇게 욕심을 내더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노래는 음악을 전공하는 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피아노를 전공한 첫째가 특히 큰 도음을 줬다. 나문희는 “딸에게 받은 수업은 어땠느냐”는 질문에 “걔(딸)는 조금 잔인하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만나야 할 때 외에는 잘 안 만나는 편”이라고 대답했다.
“음보다는 감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음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울부짖으면서 노래를 했어요. 가사하고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었고요.”
나문희의 이런 계산은 정확하게 먹혀들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굳건히 거사를 향해 달려가는 안중근 의사를 보면서 간신히 억눌렀던 눈물이, 울부짖듯 토해내는 조마리아 여사의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가 나올 때면 속절없이 흘러내린다. 영화관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그 장면에서다. 나문희는 이 장면을 무려 10회 이상 촬영했는데, 그의 62년여 연기 인생에서 가장 많은 테이크였다.
노래 선생님을 해줬던 딸 역시 이 장면에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나문희는 “딸도 영화를 보면서 울었다고 하더라”며 “옆에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이 울어서 자기도 따라서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데 조마리아 여사에 대해서는 그만큼 많이 알지 못 하잖아요. 이번 작품을 찍으면서 조마리아 여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들 안중근이 세상을 떠난 뒤에 이 양반은 여생을 어떻게 살았을까’ 싶더라고요. 엄마로 남겨진 시간을 말이에요.”
나문희는 1961년 MBC 라디오 1기 공채 성우로 데뷔, 어느덧 62주년을 맞았지만 뮤지컬 영화, 숏폼 콘텐츠 등에 계속해서 도전하며 새로운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나문희는 숏폼 플랫폼 틱톡 출연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나문희는 “막상 시작을 해보니 내가 매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좋더라. 젊은 사람들 감각도 익힐 수 있고 해서 잘 시작했구나 싶다”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두려움이 많지만 겁 없이 하는 것도 많다. 내게 닥치는 일들을 웬만하면 다 하려고 한다. 단 너무 뻔한 건 싫고 새로운 건 괜찮다”는 말이 덧붙여졌다.
“‘국민 엄마’요? 당연히 좋죠. 국민의 엄마라는 뜻인데. 근데 조마리아 여사 같은 엄마는 없을 거예요. 그분은 정말 특별한 분이세요. 저는 안중근 의사만큼이나 조마리아 여사를 존경해요. 또 하고 싶은 거요?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했던 ‘호박고구마’ 같은 연기요. 어차피 사는 건 힘드니까 희극적인 요소가 많은 게 보기 좋지 않겠어요. 그런 연기라면 다리에 힘이 빠져도 앉아서라도 하고 싶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