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배들과 작업에선 늘 배울 게 많지만 배우 류경수에게 고(故) 강수연과 함께한 ‘정이’는 더욱 남달랐다. 주변에서 고인과 호흡을 맞춰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떨림 반 설렘 반으로 임한 ‘정이’ 현장에서 류경수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웠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정이'는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벗어나 이주한 쉘터에서 발생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설적인 용병 ‘정이’의 뇌를 복제해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SF 영화. '부산행' '지옥' 연상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김현주가 정이 역을, 고 강수연이 정이의 뇌를 복제해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는 서현 역할을 맡았다.
류경수는 ‘정이’에서 AI 연구소장 상훈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일간스포츠와 최근 서울 종로구 카페에서 만난 류경수는 '정이'에서 호흡을 맞춘 고 강수연에 대해 “배울 게 많은 선배였다”고 이야기했다.
“너무 대배우시잖아요. 배우 중의 배우. 그래서 작품에 들어가기 전엔 걱정도 많이 됐던 것 같아요. 선배님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어도 주변에서 선배님이랑 작업을 해 본 사람이 없어서 물어볼 사람이 없었어요. 사실 그것도 영광이죠. 선배님과 작업을 같이 한 몇 안 되는 젊은 배우가 저라는게요.”
류경수와 강수연은 '정이'에서 연구소장과 팀장인 만큼 함께 연기하는 장면이 많았다. 류경수가 ‘정이’에서 처음으로 찍은 장면 역시 고 강수연과 함께였다.
“준비한 걸 처음 보여드려야 되는 자리인데, 솔직히 걱정이 되더라고요. 보는 사람마다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나 연기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는 거니까요. 일단 저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서서 그렇게 준비를 해갔는데, 막상 현장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걱정이었어요. 프레젠테이션 끝나고 상훈의 방으로 와서 서현이한테 한참 얘기를 하는 장면이었거든요. 하필 또 대사도 길었어요. (웃음) 오케이가 딱 나오고 감독님보다 선배님한테 먼저 갔어요. ‘저 어떠셨어요?’하고 물었죠.”
“그래서 강수연이 뭐라고 하던가”라고 묻자 류경수는 “긍정적으로 반응해 줬다”며 웃음을 보였다. 그는 “내가 ‘이상하지 않았느냐’고 하니 선배가 ‘왜? 너무 매력 있는데?’라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대선배의 그런 긍정적인 피드백이 류경수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상훈을 연기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됐다.
고 강수연에게 도움을 받은 건 비단 연기적인 부분에서만이 아니다. 현장에서 배우가 갖춰야 할 태도, 작품에 임하는 자세와 같은 부분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경력에 기대어 잘난 척하지 않는 태도, 그 친근함이 류경수에게 신선한 충격이 됐다.
“선배님과 같이 모니터 앞 의자에 앉아 있으면 그냥 선배님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어요. 옆에 앉은 저는 미생물 같고요. (웃음) 그런 존재감을 갖고 계시면서도 현장에서의 태도는 근사하기 그지 없었어요. 선배님이 스태프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걸 보면 정말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여유와 친절함… 사실 배우라는 것도 그냥 수만 가지 직업 가운데 하나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뭘 대단한 걸 한다고 어떨 때는 집중해야 된다고 예민해하고 말도 안 하고 그랬나’ 싶더라고요. 선배님한테 그런 걸 많이 배웠어요. 말보다 몸으로 보여주시는 그런 것들로부터요.”
류경수는 강수연에게서 받은 것들로 앞으로도 계속 선배들과 작품을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됐다. 작품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까지 이어지는 귀중한 가르침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류경수의 필모그래피에는 황정민과 함께했던 ‘인질’(2021), 송강호, 배두나 등과 함께한 ‘브로커’(2022), 박성웅과 함께한 ‘대무가’(2022) 등 영화계의 굵직한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 작품들이 여럿 있다.
“연기자로 살아가는 방식, 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 같은 것들을 선배들로부터 많이 배워요. 당연히 저 스스로 알아가고 성장하는 부분도 있어야겠지만, 선배들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해왔는지, 저는 어떻게 해야할지 같은 이야기들을 되도록 많이 듣고 싶어요. 여전히 저는 제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선배들로부터 듣는 그런 조언들이 작품을 할 때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매 작품을 할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는 고통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간다는 류경수. ‘정이’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도 촬영에 임하고 있는 다른 작품 걱정을 놓지 못하고 있을 만큼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또 작품에 늘 진심이다. 이런 치열한 고민이 류경수를 충무로의 샛별에서 글로벌 대작에 출연하는 대세 배우로 빠르게 성장시킨 것이리라.
그럼에도 류경수는 여전히 성장에 목마르다. 어떤 한 작품도 쉽지 않고, 매번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그래도 자신이 한 연기를 누군가 재미있게 봐주고, 자신이 의도한 바를 누군가 정확히 알아줄 때의 보람으로 류경수는 쉽지 않은 배우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있다.
“정답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게 맞을까를 고민해가는 그 과정 자체가 가치 있다고 봐요. 그래서 만약 정답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보고 그대로 하고 싶진 않아요. 제 스스로 고민해서 표현하는 과정, 그게 작품을 대하는 배우로서 성의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쨌든 그런 불안함 속에서도 버티고 여기까지 왔다는 데 대해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 아무도 안 찾아주는 시간을 버틴 제 자신이 대견하고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스러워요. 그 덕에 연기를 계속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