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은 최근 영화 ‘궁지에 몰린 쥐는 치즈 꿈을 꾼다’(‘쥐 치즈’) 개봉을 맞아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 같이 말하며 웃었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에 이어 ‘더 퍼스트 슬램덩크’까지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하면서 일본영화 열풍이 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다.
그 어느 때보다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진 한국 극장가. 여기에 ‘쥐 치즈’에 일본에서 메가히트를 기록한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개봉을 앞두며 일본영화 붐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유키사다 감독은 “이 영화만 잘 안 됐다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걱정”이라면서도 “한국에서 이렇게 일본 작품이 사랑받는 게 기쁜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 등 최근 내한하는 일본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바로 한국 영화의 또렷한 성장세다. 아시아에서 ‘한류’로 시작된 K콘텐츠는 ‘스위트홈’, ‘오징어 게임’ 등을 거치며 전 세계가 사랑하는 콘텐츠가 됐다. 이에 넷플릭스, 디즈니+ 등 글로벌 OTT 서비스들이 한국 콘텐츠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면서 ‘승리호’, ‘정이’, ‘카지노’ 같은 큰 제작비가 드는 작품들도 나오게 됐다.
그러는 사이 일본영화는 세계 시장에서 다소 주춤한 모양새다. 일본의 거장들이 “한국 콘텐츠를 보고 배우자”는 결심을 하게 되는 이유다. 유키사다 감독 역시 “한국의 콘텐츠는 세계 어느 콘텐츠와 견줘도 대등할 정도로 잘나가고 있고 일본의 콘텐츠는 상대적으로 약해져온 것 같은 마음이 있다”면서 “어째서 한국의 콘텐츠가 그렇게 파워풀한지 그 비밀을 캐고 싶은 마음이 내게도 있다”고 토로했다.
유키사다 감독은 그러면서 한국과 합작에 대해서도 마음을 활짝 열었다. 그는 관련 질문에 “날카롭다. 사실 인터뷰 전날 한국과 합작에 대한 회의를 했다”면서 “한국과 일본이 함께하면 또 다른 형태의 성공을 낳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방향과 마음만 맞다면 꼭 (한국과 합작을) 해보고 싶다”고 희망했다.
사실 유키사다 감독과 한국 제작진과 협업은 이전에도 논의됐다. 유키사다 감독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를 한국에서 ‘파랑주의보’(2005)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 했을 때다. 유키사다 감독은 “처음에 ‘파랑주의보’ 각본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며 “나 나름대로는 ‘한국 상황에 맞게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다’는 플랜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변경하고 싶은 방향이 있다고 해서 물러났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그때부터 한국의 영화계엔 관심이 컸다. 유키사다 감독은 “‘파랑주의보’가 만들어질 때부터 한국엔 신선한 배우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며 “한국 배우들은 일본보다 층이 두텁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몰랐던 파워풀함을 한국 배우들에게서 봤고, 함께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쥐 치즈’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한국 발행본은 ‘궁지에 몰린’이 생략돼 ‘쥐는 치즈 꿈을 꾼다’라는 제목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남자와 남자라는 것만 빼면 유키사다 감독이 이제까지 여러 작품을 통해 그려왔던 열병 같은 사랑의 면면을 담고 있다. 다만 이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라는 점이 아직은 낯설기에 누군가에겐 파격으로 보일 수도 있다.
유키사다 감독은 처음으로 퀴어 로맨스를 영화화한 이유에 대해 “내가 만드는 러브 스토리의 순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고 운을 뗐다.
“그렇다고 뭐 불순해졌다는 건 아니다. (웃음) 불륜이라든가 그런 다른 형태로 자꾸 변해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 관심을 두던 연애 감정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이야기에 눌려 망가질 것 같은 경험을 몇 번 하면서 제가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는 순도 높은 이야기에 굶주려 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쥐 치즈’를 선택했다.”
유키사다 감독은 ‘쥐 치즈’의 원작을 읽고 ‘인간에 대한 호의가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적중했다. 감독은 ‘쥐 치즈’를 연출하며 새로이 순도를 찾아가는 경험을 했다.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는 과정을 보면서 귀엽다는 생각을 했고 설레기도 했다. 새로운 문을 열고 새로운 순도를 발견한 것 같다.”
유키사다 감독은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은 만들지 않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리버스 엣지’(2018)를 지나 ‘쥐 치즈’에 이르며 변화가 생겼다. 유키사다 감독은 “원래는 만화가 원작인 영화를 하지 않았는데, 전설의 만화인 ‘리버스 엣지’를 작업하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거스르지 못 하고 참여하게 됐다. 마치 큰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그 작품을 영화로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쥐 치즈’ 역시 ‘리버스 엣지’처럼 코어층의 지지가 탄탄했던 작품. 마니아층 사이에선 ‘전설의 만화’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유키사다 감독은 “‘리버스 엣지’와 비교하면 ‘쥐 치즈’가 더 만화다운 리얼리티를 가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영화적인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게 더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영화와 만화에는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는데 이에 대해 감독은 “원작이 소설이든 무엇이든 간에 영화의 테마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건 감독인 나의 몫”이라며 “그러한 나의 판단에 따라 가다 보니 결말이 조금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사실 원작에 대한 기억이 이젠 흐릿해서 원작과 비교해 영화에서 어떤 점을 다르게 표현했는지 정확하게 다 기억이 나진 않는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연기파 배우로 꼽히는 나리타 료는 ‘쥐 치즈’에서 오랜 시간 열병처럼 사랑을 간직해온 이마가세 역을 맡아 압도적인 감정 연기를 보여준다. 그와 호흡을 맞춘 건 인기 그룹 칸쟈니8의 멤버 오쿠라 타다요시다.
유키사다 감독은 “나리타 료와 내가 이마가세 캐릭터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이 영화의 열쇠라고 생각했다”며 “사회적으로 동성애자는 소수자이지만 ‘쥐 치즈’ 속 이마가세 만큼은 강인하고 용감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쿄이치는 그와 반대편에 있는 캐릭터다. 이 두 캐릭터의 대비가 잘 표현된다면 이 영화는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