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한 야구 대표팀이 비장한 각오를 안고 장도에 올랐다. 15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에 집결한 선수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호주와 일본을 비롯해 각자 소속 팀에서 스프링캠프를 소화하다 장시간 이동 끝에 합류, 여독이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대부분이 웃음기를 뺀 모습으로 묘한 긴장감까지 흘렀다.
기회이면서 위기. 이번 WBC를 바라보는 한국야구의 시선은 복잡하다. WBC는 야구 국제대회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미국 메이저리그(MLB) 사무국이 주관하는 대회로 올림픽·아시안게임과 달리 현역 빅리거가 총출동한다. 5회째를 맞이한 이번 대회에도 일찌감치 마이크 트라웃과 오타니 쇼헤이(이상 LA 에인절스) 무키 베츠(LA 다저스)를 비롯한 MLB 슈퍼스타의 출전 확정이 줄을 이었다. 그만큼 WBC는 한국 야구 수준을 세계 야구에 시험하는 좋은 기회다. 하지만 자칫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이미 한국야구는 2021년 도쿄 올림픽 노메달로 큰 위기를 겪은 터다.
21세기 한국야구 최대 부흥기는 2009년 전후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9전 전승 금메달 신화를 이뤘고, 이듬해 열린 WBC에선 준우승을 거뒀다. 국제대회의 좋은 성적은 프로야구가 한 단계 발전하는 밑거름이 됐다. KBO리그 정규시즌 관중은 2008년 500만명, 2011년 600만명, 2012년에는 700만명을 돌파하며 연도별 기록을 꾸준히 갈아치웠다. 야구장을 찾는 팬이 늘면서 아마야구 저변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베이징 올림픽 야구 열풍으로 야구를 시작한 이른바 '베이징 키즈'가 KBO리그에 등장하기도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호황기를 누린 축구처럼 한동안 훈풍이 불었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2017년 840만으로 정점을 찍은 관중이 지난해 600만명까지 급락했다. 프로야구 10개 구단 체제(총 720경기)로 운영된 2015년 이후 코로나 확산 탓에 입장 제한이 있던 2020~2021년을 제외하면 사실상 최저 기록이다. 인기가 시들어진 이유 중 하나가 국제대회 부진이다. 팬들로부터 경기력을 인정받지 못한 게 크다.
한국야구는 2017년 WBC에서 졸전 끝에 1라운드 탈락했다. 도쿄 올림픽에선 일본에 발목이 잡히며 빈손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축구 대표팀이 16강 진출에 성공하면서 야구계 안팎의 위기감이 더 고조됐다. 축구로 쏠린 관심을 돌리려면 이번 WBC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 KBO가 순혈주의를 깨고 한국계 혼혈 선수인 토미 에드먼(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을 대표팀에 발탁한 것도 이번 대회 성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월드컵 하면 온 세계가 떠들썩하지 않나. (MLB 사무국이) WBC를 그렇게 만드는 걸 목표로 하기 때문에 한국 대표팀의 선전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좋은 선수들이 발탁돼 대표팀이 잘하는 건 KBO의 문제가 아니라 아마추어에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대표팀의 핵심 자원인 이정후(키움 히어로즈)는 "우리가 잘해야 앞으로 야구할 후배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우리를 보고 야구를 몰랐던 사람들이 야구를 알게 되고, 야구를 시작하지 않았던 애들이 우리의 멋진 모습을 보고 시작하면 야구 인프라도 그렇게 좋아질 거"라고 말했다.
이강철 KT 위즈 감독이 이끄는 야구 대표팀은 16일 본격 훈련을 시작한다. 현역 빅리거인 김하성(샌디에이고 파드리스)과 에드먼은 소속팀에서 스프링캠프를 소화한 뒤 향후 합류할 계획이다. 과연 '우물 안 개구리'라는 평가를 벗어나 기대하는 성적표를 받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