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같은 외국인 출연 한국 홍보(?) 방송에 서울 광장시장은 반드시 등장합니다. 떡볶이, 순대, 김밥, 육회, 산 낙지, 칼국수, 비빔밥 등 한국 서민 음식이 다 모여 있는 시장이기 때문이지요.
광장시장 전체를 압도하는 음식은 단연 빈대떡입니다. 네모난 번철에 기름을 가득 부어 빈대떡을 튀기는 가게들이 광장시장의 ‘얼굴’입니다. 시장 안은 빈대떡이 튀겨지는 냄새로 가득하여 1970년대 잔칫집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광장시장에서만 보면 빈대떡은 한국인의 ‘영혼의 음식’입니다. 시장을 벗어나면 빈대떡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심 골목에 숨어 있던 빈대떡 대폿집들이 사라졌습니다. 빈대떡 골목으로 유명했던 종로 피맛골도 재개발이 되면서 빈대떡집들을 떠나보냈습니다.
도심의 대폿집 빈대떡이 사라져가는 것과 광장시장 빈대떡이 번창하는 것이 맞물려 있는 듯이 보이는데, 문화적 현상은 아니고 단지 가게세 탓에 벌어진 일입니다. 도심의 번듯한 건물에서 빈대떡을 부쳐 팔아서는 돈이 안 됩니다. 1945년 개업한 피맛골 빈대떡집이 피맛골 재개발 이후 번듯한 건물에 입주했다가 가게세가 감당이 안 되어 연신내의 재래시장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요릿집 앞에서 매를 맞는 신사에게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하고 힐난하는 노래가 나온 것이 1943년입니다. 그 이전에도 빈대떡이 고급한 음식으로 취급된 기록은 안 보입니다. 빈대떡은 예나 지금이나 민중의 술자리에 놓이는 안주 겸 끼니입니다.
빈대떡의 재료는 녹두입니다. 녹두는 자갈밭에서 잡초와 경쟁하면서도 잘 자랍니다. 전북 정읍에서 한 늙은 농민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관아에서 세금을 매길 때에 논밭 면적을 기준으로 하잖아요. 녹두를 산비탈에다 심어놓으면 저게 밭인지 야산인지 구별이 안 갑니다. 그래서, 농민들이 녹두를 많이 심었습니다.”
녹두는 수탈을 피할 수 있는 작물이라고, 늙은 농민은 조선에서의 일을 마치 엊그제의 일인 양 제게 전해주었습니다. 녹두밭에 앉지 말아야 하는 파랑새가 탐관오리라는 해석이 있는데, 늙은 농민의 전언이 이 해석에 힘을 실어줍니다. 야산의 녹두밭이 탐관오리에게 들키면 안 되는 것이지요.
1980년대 말부터 12년간 피맛골에 있는 건물에서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면 어쭙잖은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빠져나와 빈대떡을 먹었습니다. 피맛골 빈대떡은 녹두를 곱게 갈아서 돼지기름에 얇게 지져내었습니다. 돼지고기가 두어 점 올려질 뿐 반죽에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리굴조개젓을 곁들여 막걸리와 먹습니다.
광장시장의 빈대떡은 녹두 반죽에 숙주와 파 등 채소가 들어가고 식용유를 넉넉하게 부어 튀깁니다. ‘겉바속촉’이라는 미식적 기준을 여기다가 댈 수도 있겠지만, 제 입에는 빈대떡이 아니라 채소튀김 같습니다. 광장시장 빈대떡을 먹어온 분은 광장시장 빈대떡이 맛있고, 저처럼 피맛골 빈대떡을 먹어온 분은 피맛골 빈대떡이 맛있을 겁니다. 맛의 8할은 추억입니다.
종로 피맛골에서 큰길로 나오면 전봉준 장군 동상이 보입니다. 1호선 종각역 5번과 6번 출구 사이에 있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녹두장군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키가 작아서’라고 하는데, 녹두를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작은 키를 빗대었다면 좁쌀장군이라고 했겠지요.
녹두는 익으면 꼬투리를 “탁” 하고 열어서 튕겨나갑니다. 녹두 꼬투리를 손에 쥐면 녹두가 치고나가는 힘이 얼마나 강렬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녹두 농사를 지어본 농민은 녹두의 힘을 압니다. 동학혁명군은 작지만 온 힘을 다해 튕겨나가는 맹렬한 기세를 전봉준 장군에게서 보았고, 그래서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피맛골이 재개발되면서 밀려난 빈대떡집에 앉아 번철에 곱게 지져진 빈대떡을 먹으며, 광화문광장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겨우 종로1가 네거리에, 그것도 서지 못하고 앉아 있는 녹두장군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까 궁리를 하다가 울컥하여 막걸리를 쏟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