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배구 여오현(현대캐피탈)은 V리그 남자부에서 여전히 스파이크 서브를 가장 잘 받는 선수다. 올해 그의 나이는 마흔다섯이다. 4대 프로 스포츠 현역 최고령 선수. 하지만 그는 마침표를 찍을 생각이 없다. 여오현은 "구단에서 '다음 시즌에도 함께 하자'고 제안하면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계속 뛰어야죠"라며 웃었다.
여오현은 지난 21일 천안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2022~23 도드람 V리그 우리카드와 홈 경기에서 개인 통산 6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V리그 최초 기록이다. 2세트 종료 후 기념행사가 열렸고, 3-0 승리 후엔 후배들의 헹가래를 받았다.
여오현은 "젊은 시절 모습이 전광판에 나오자 울컥했다. 눈물 참느라 고생했다"면서 "배구 시작 후 처음으로 헹가래를 받았다. 후배들에게 헹가래 받는 걸 거절했는데, 역시 MZ 세대가 톡톡 튄다"고 웃었다.
여오현의 신장은 1m75㎝다. 배구 선수로는 아주 작다. 학창 시절 별명이 '슈퍼 땅콩'이었다. 그런데 여오현의 원래 포지션은 높이가 중요한 아웃사이드 히터(레프트)였다. 여오현은 "막 창단한 배구부에서 빵과 우유를 나눠줘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키가 작았다. 중학교 감독님께서 '비전이 없을 것 같으니 다른 종목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고 회상했다.
여오현은 인근 학교를 돌아다니며 역도와 유도, 레슬링 입단 테스트를 했다. 그는 "미련이 남지 않도록 여러 종목 테스트를 봤지만 나랑 맞지 않더라. 감독님께 '배구 계속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떠올렸다.
그의 배구 인생은 홍익대 2학년 때 전환기를 맞았다. 수비 전문 포지션인 리베로 제도가 도입됐다. 여오현은 "만일 리베로 제도가 없었다면 아마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유소년 또는 초등학교 배구부 지도자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내 키로는 실업팀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운 좋게도 적절한 시기에 리베로 제도가 생겨 프로에 입단했다"고 돌아봤다.
프로 출범 전인 2000년 삼성화재에 입단한 여오현은 2013년 현대캐피탈로 이적했다. 2016년 현대캐피탈은 '여오현 45세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여오현은 구단의 세심한 관리 덕에 현재까지 선수로 뛰고 있다.
그는 "7년 전 최태웅 감독님께서 '내가 도와줄 테니 한 번 해보자'고 하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도전이었다"며 "구단에서 식단 관리와 필라테스 등 훈련 프로그램까지 제공했다.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그는 "600경기 출장 후 지인들로부터 문자 폭탄을 맞았다. '이제 50세까지 뛰는 거냐'고 많이 묻더라. 내가 힘들어서 그때까지는 못 뛸 것 같다. 컨디션 회복이 느려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며 웃었다.
현대캐피탈의 주전 리베로는 박경민이다. 여오현은 한발 물러서 있다. 대신 중요한 승부처 상황에서 투입돼 경기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맡는다.
그는 "리빌딩 과정에서 백업으로 물러나자 처음에는 헛헛하고, 힘도 빠지더라. (선수로서 삶에) 낙이 없었다"며 "마음을 내려놓자 배구가 더 잘 보이더라.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생각하고 있어 큰 공부가 된다. 지금 경민이처럼 뛸 순 없다. 팀이 힘들 때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여오현의 목표는 열 손가락에 모두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를 끼는 것이다. 현재까지 V리그에서 가장 많은 9개의 반지를 수집했다. 현대캐피탈은 대한항공과 엎치락뒤치락 선두 경쟁 중이다. 여오현은 "(4라운드까지 9점 차였던 승점 차를 좁히는 등) 팀 분위기가 좋아 욕심이 난다. 이번에는 (후배들에게) 살짝 업혀 가야지"라며 껄껄 웃었다.
'배구 여제' 김연경(흥국생명)은 여전히 최정상의 기량을 자랑하면서도 은퇴를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여오현은 "연경이는 많은 걸 이뤘다. 선수마다 은퇴 시기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연경이는 대외적으로도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피겨 김연아처럼 단순히 국내를 떠나 국제 무대에서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직 내 은퇴 시기에 관해 정해두진 않았다. 팀이 필요로 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뛰려 한다"고 덧붙였다.
여오현의 두 아들은 현재 각 송산고, 송산중에서 배구를 하고 있다. 여오현은 "처음에는 배구 입문을 반대했다. 가끔 아이들에게 '후회하거나 힘들지 않냐'고 묻는데 '전혀 아니다'고 답하더라. 큰아들이 세터로 뛰다가 최근 리베로로 전향했다. 나처럼 신장이 작은 탓이다. 그래서 미안하다"면서 "남들 공 10개 받을 때 100개 받으라고 조언한다"고 귀띔했다.
그는 "배구는 나의 전부다. 전성기와 비교하면 (내 기량이) 많이 떨어졌지만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뛰고 있다. 아직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팬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라고 인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