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적 김은숙이야?” 자신의 유명세에 고등학생 딸이 괴롭힘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김은숙 작가에게 딸이 되돌려준 말은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시청률 보증수표’라는 수식어를 지닌 김 작가에게는 꽤 속이 쓰린 평가일지 몰라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팩폭’(팩트 폭격)이었다.
‘파리의 연인’(2004), ‘프라하의 연인’(2005), ‘온에어’(2008), ‘시크릿 가든’(2010), ‘태양의 후예’(2016) '도깨비'(2016) 등 ‘신데렐라 판타지’에 김은숙표의 ‘워드 플레이’, 즉 ‘말맛’이 버무려진 작품들은 큰 사랑을 받았으나 2020년 방영된 ‘더 킹: 영원의 군주’는 그야말로 혹평 일색이었다. 까칠한 재력가 남성이 평범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진부한 작법과 ‘신데렐라’가 되는 수동적 여성상을 답습하면서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거액의 제작비와 초호화 캐스팅에도 무참히 무너진 ‘더 킹: 영원의 군주’는 숱한 논란을 낳으며 쓸쓸하게 퇴장했고, 그만큼 김 작가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흥행은 김 작가에게 더 찬란하다. ‘학교폭력’이라는 사회 주요 소재에 피해자의 고통, 가해자들을 향한 응징 등 자칫 뻔한 복수극으로 펼쳐질 수 있는 내용들을 영리하게 엮어내면서 지루할 틈 없는 속도감으로 풀어냈다. 지난해 12월 ‘파트1’이 첫 공개되자마자 무섭게 입소문을 탔고 너도나도 “연진아”를 외치는 등 화제성도 폭발적이었다.
예상대로 ‘파트2’는 ‘파트1’의 인기를 이어받으며, 지난 13일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부문 전세계 1위에 올랐고 공개 첫날인 10일 국내 넷플릭스 애플리케이션 이용자가 474만 명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를 경신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파트2’ 공개 전 진행된 GV에서도 김 작가는 다소 격앙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전국에 있는 박연진 씨 정말 죄송하다. 사과드리고 싶었다”면서도 “하지만 연진아, 나 지금 되게 신나”라며 높은 인기를 만끽했다.
김 작가의 첫 복수극 ‘더 글로리’는 그동안 김 작가가 선보였던 서사뿐 아니라 캐릭터들도 무척 다르다. ‘시크릿 가든’ 종영 후 “또 다른 신데렐라 이야기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계속 쓸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했듯 그간 기존 로맨스 작품을 비틀고 비틀어 연이은 히트작을 내놓았다면, ‘더 글로리’는 로맨스를 지우고 ‘피해자’에 오롯이 집중한 작품이다.
극 중 ‘학폭’ 피해를 입은 동은(송혜교)이 학창시절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현재에서도 ‘연진이’를 부르는 모습은, 쉽사리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실제 피해자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동은이의 몸 곳곳을 뒤덮은 물리적 상처들도, 어쩌면 잊고 싶어도 매일 마주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고통을 짐작케 한다.
또 김 작가는 기존 성별 간 이분법적 구도를 피해자와 가해자로 옮겨오면서도 이들 간의 이야기를 더 다양한 층위로 채워 넣었다. 동은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현남(염혜란)이 공조를 이루는 모습에서 피해자들의 연대를, 연진(임지연)을 비롯해 가해자들 사이에선 헐거운 유대를 그린 모습이 단적인 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주로 기존의 복수극들이 ‘폭력이 폭력을 낳는’ 함정에 빠지면서 선정성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다면, ‘더 글로리’는 이 같은 딜레마를 슬기롭게 비껴간다. 어딘가 하나씩 부족한 가해자들은 서로 할퀴고 스스로 몰락해간다. 피해자인 동은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오직 판을 짜는 ‘설계자’로만 남는다.
김 작가는 “폭력의 순간에는 인간의 존엄, 명예, 영광 같은 것들을 잃게 된다”며 “피해자들이 ‘원점’이 되는 상태를 응원한다”고 드라마 제목의 의미를 설명했다. 드라마가 끝날 때쯤 폭력을 당하고 복수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동은은 어떤 심정이었는지, 과연 복수의 끝에서 동은은 ‘원점’이 됐는지 등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되는 제목이다.
“엄마는 내가 죽도록 맞는 게 가슴 아프냐, 죽도록 때리는 게 가슴 아프냐”는 딸의 질문에 ‘더 글로리’를 집필하게 됐다는 김 작가는, 작품 내내 이 같은 질문들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갔고 극 중 복수를 마쳐갈 즈음 동은이 “죽도록 행복하고 싶다”는 대사에서 얼기설기 그 답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 지난한 고뇌의 과정은 하얗게 센 작가의 헤어스타일이 대변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