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과 짬뽕의 분별 기준은 무엇일까요. 안 매우면 우동, 매우면 짬뽕일까요. 안 매운 짬뽕도 있는데, 이건 우동의 변종일까요.
우동과 짬뽕의 계통도를 그리면서 이 두 면 요리의 역사를 더듬는 일은 뒤로 미루고, 단순하게 조리법만으로 분별하겠습니다. 고기와 해물, 채소 등을 웍에 넣고 볶다가 육수를 더하여 국물을 얻은 다음에 면을 합하면 짬뽕이고, 고기와 해물, 채소 등을 웍에 넣고 끓인 다음에 면을 합하면 우동입니다. 짬뽕은 국물이 무겁고 우동은 가볍습니다.
지하철 3호선 삼송역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의 역입니다. 삼송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듣습니다. 삼송리라고 해야, “아하, 검문소가 있던 거기”라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고양군 신도읍 삼송리였습니다.
삼송리는 서울과 북쪽 휴전선 군부대 지역을 가르는 경계에 있습니다. 서울에서 파주나 문산을 가려면 삼송리를 거치게 되는데, 버스에 헌병이 올라와 검문을 했습니다. 군인이 총까지 들고 올라와 승객의 신분증을 검사했습니다. 12.12군사반란 때에 노태우가 수도권 북쪽을 지키는 군대를 불법하게 동원하여 서울로 진입할 때에 이 검문소를 거쳐갔습니다.
삼송동은 더 이상 검문소가 있는 수도권 북쪽 외곽 동네가 아닙니다. 신도시로 개발이 되어 아파트와 대형 쇼핑몰이 들어섰습니다. 검문소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크게 변하였습니다.
삼송리(저는 삼송동이 어색합니다. 삼송리라고 하겠습니다)에서 25년 넘게 살고 있는 최정철 작가가 ‘삼송 사피엔스’라는 소설을 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얼키설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입니다. 실재하는 공간이고 등장인물도 실재하는 인물입니다. 물론 스토리에는 작가의 ‘뻥’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삼송 사피엔스’에 중국집이 등장합니다. 45년 동안 삼송리에서 최강자로 군림해온 동네 중국집입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실재하는 중국집입니다. 최 작가에게 전화하여 거기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습니다.
삼송리에는 아직 옛 동네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낡은 ‘부로쿠’ 담벼락 골목이 정겨웠습니다. 45년을 버틴 중국집은 낡고 소박하였습니다.
중국집 점심은 짜장에 탕수육이지 않습니까. 최 작가와 그렇게 차려서 먹고 있는데, 문득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우동도 맛있어요.” 제 대답이 이랬습니다. “이 집에 우동도 있어요?” 이 말을 뱉고 난 후 세상에, 중국집에 더 이상 우동이 없는 것으로 제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옛날 중국집에는 메뉴판에 적힌 순서가 우동 다음에 짜장면이었습니다. 짬뽕 없는 집이 많았습니다. 우동은 고급하고, 짜장면은 아이들이나 먹는 음식으로 여겼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우동을 주문하면 제법 음식을 즐길 줄 아는 사람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적어도 1980년대 중반 정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짬뽕이 득세하기 시작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88올림픽 무렵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당시에 매운 음식이 한국 음식의 특징인 것으로 확정짓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짬뽕은 매운맛을 앞세워 한국인이 사랑하는 음식으로 등극합니다. 이 짬뽕에 짜장면은 밀릴 일이 없었습니다. 짜장면은 국물이 있는 면 요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짬뽕은 순식간에 우동을 대체하였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대가족 음식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입맛이 기준입니다. 딸·아들들과 그 아래 손녀·손자들은 자연스레 입맛을 대물림합니다. 1960년대 한반도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핵가족이 탄생하고 또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하니 입맛을 대물림하는 일이 사라졌습니다. 청소년기에 바로 외식업체의 음식에 적응하게 됩니다. 자극적인 맛의 짬뽕이 크게 번창하게 된 이유가 입맛의 대물림이 끊어진 탓도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삼송리에서 45년을 버틴 동네 중국집에서 옛날 우동을 먹으며 기뻐하다가 이내 우울해졌습니다. 이런 동네 중국집도, 이런 우동도 머잖아 사라질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단절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