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피면, 이제 저 세상 사람이 된 요리사 임지호가 생각납니다. 그때가, 한 20년 전이었나 싶습니다. 밥 다 먹고 나가려는데 그가 저는 붙잡았습니다.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다탁에 앉았더니 보자기를 들고 나와 제 앞에서 풀었습니다. 보자기 안에는 한지가 곱게 접혀 있었습니다. 뭔 차를 저리 귀중하게 다루나 싶어 제 몸을 보자기 앞으로 밀었습니다. 한지를 펼치니 그 안에서 꽃잎이 몇 장 나왔습니다.
임지호는 자신의 일을 칭찬받고 싶어하는 어린 아이처럼 말했습니다.
“남쪽 바닷가에 갔는데, 매화가 만발했더라고요. 거기서 하룻밤을 잤지요. 해무가 깔린 새벽에 매화나무에게 가서 꽃잎을 몇 장 땄습니다. 매화는 해가 뜨면 향이 옅어지거든요. 바로 방바닥에 깔아서 말리고 한지로 싸서 보자기에 담아 왔지요.”
임지호의 매화차는 저를 매화꽃이 만개한 남녘 바닷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시공을 넘나들게 하는 음식의 매력을 그때에 제대로 느꼈습니다. 임지호의 매화차 한잔으로 저의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준’이 분명해졌고, 봄꽃이 피면 임지호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임지호가 갔어도 임지호가 남긴 향은 아직 남았습니다.
제 고향은 마산입니다. 마산 뒷산이 무학산입니다. 돌산인데다 습한 골이 많아서 봄이면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에 형들을 따라 뒷산을 오른 적이 있는데, 그때에 진달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꽃을 먹다니! 얼마나 신비로웠는지 그때의 진달래꽃 향이 지금도 코끝에 남아 있습니다.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하는데, 맛있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화전을 부치는 식용유가 진달래꽃의 향과 맛을 다 가져갑니다. 진달래꽃 향은 술이어야 제대로 잡을 수 있습니다. 봄날에 진달래꽃술에 대취했던 오랜 기억이 있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 함께 진달래꽃술을 마셨던 몇 분도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 따라 완월폭포로 놀러가서 아카시아꽃을 먹었습니다. 달콤하고 화사한 향이 입안에 가득 차는 경험을 했습니다. 중고 시절 제 주머니에 항상 아카시아 껌이 있었던 것은 그때의 경험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라일락꽃에는 첫사랑의 맛이 난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아직 라일락꽃을 맛본 적이 없으시다고요? 첫사랑은 해보셨고요? 라일락꽃송이를 입안에 넣고 꽃대를 뽑듯이 쭉 당겨서 맛을 보세요. 첫사랑의 맛을 잊는 분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맛입니다.
봄꽃의 으뜸은 벚꽃이지요. 벚나무를 얼마나 많이 심었는지 대한민국에 벚꽃 명소 아닌 곳이 없습니다. 제가 사는 일산도 벚꽃이 만만치 않게 예쁩니다.
그래도 벚꽃 하면 진해이지요. 군항제 기간에는 난리가 납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도 진해에 벚꽃이 피면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때는 ‘벚꽃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벚꽃이 피는 무렵에 열리는 난장이라는 뜻입니다. 여인네들은 화사한 한복을 입고 남정네들은 칙칙한 양복을 입고 벚나무 아래에 모여서 술 마시고 장구 치고 노래하며 놀았습니다.
제게 벚꽃장은 난생 처음의 축제였습니다. 서커스단의 곡예를 처음 본 데가 벚꽃장이었고, 솜사탕과 사이다를 처음 맛본 데가 벚꽃장이었으며, 어른들이 낮술을 마시고 춤추며 노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데도 벚꽃장이었습니다.
벚꽃 아래에 모인 가족이 누구누구였는지 기억이 흐릿합니다. 네모난 찬합은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분홍의 옻칠에 꽃무늬까지 기억합니다. 찬합에 김밥이나 유부초밥이 들었을 것인데, 이도 기억이 없습니다. 솜사탕과 사이다에 영혼이 팔렸던 것이 분명합니다. 벚꽃의 맛은 제게는 솜사탕과 사이다 맛입니다.
벚꽃장에서 봄바람에 흩날려 나를 스쳐지나갔던 벚꽃잎의 향은 내 몸에 선명히 남았습니다. 매년 벚꽃 아래에 서려는 것은 벚꽃장의 어린 황교익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봄꽃은 피면서 집니다. 순식간에 왔다가 순식간에 갑니다. 그래서 봄꽃을 못 보고 봄을 넘기는 해도 있습니다. 한 번의 인생에 몇 번의 봄을 즐길 수 있다고 그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