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팬티에 신경 쓰는 남성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다. 끝없이 자신을 개발하는 '오운완(오늘운동완료)' 열풍 속에 속옷도 개성으로 생각하는 젠지세대(Gen-Z세대, 10~20대)가 부상한 결과다. '엄마가 사준 5000원 짜리 팬티'를 고민 없이 입었던 남성들은 이제 신명품으로 떠오른 브랜드의 수십만 원짜리 팬티를 사들인다.
팬티에 계급이 있다?
40대 주부 A 씨는 얼마 전 온라인 중고거래 커뮤니티에서 남성용 캘빈클라인 언더웨어(이하 캘빈클라인) 7장을 판매했다. 남편이 입으려고 2년 전 해외에서 산 제품인데 사이즈가 너무 작아 중고 거래로 처분하기로 결심했다. 새 팬티 7장을 4만원 수준에 올렸던 A 씨는 곧바로 밀려드는 문의를 보고 깜짝 놀랐다.
A 씨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인데 '요즘 운동하고 있어 팬티 관심이 커졌다. (팬티를) 다 사고 싶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캘빈클라인이 과거에 유행했던 브랜드이고, 새 팬티라고 해도 중고거래라서 '젊은이들이 꺼리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며 "이 청년이 '혹시 갖고 있는 브랜드 팬티 중 더 판매할 것은 없느냐'며 재차 물었다"고 덧붙였다.
10~30대 남성들이 언더웨어에 꽂혔다. 과거만 해도 엄마가 사준 원단 좋은 면 팬티나, 펑퍼짐한 트렁크 팬티가 최고인 줄 알고 입었지만 요즘은 다르다.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과 색깔은 물론, 브랜드 이미지와 홍보 모델까지 고루 따진 뒤 산다. 대형 마트 매대에서 볼 수 있는 3장 묶음에 1만원짜리 실속형 팬티나, '쌍방울' 'TRY' 등 품질로 유명한 전통의 언더웨어는 잘 보지 않는 분위기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신종 '팬티 계급도'만 봐도 이런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 이 계급도는 마치 소득 수준에 따라 타야 하는 자동차 브랜드를 나누 듯, 연봉에 맞는 팬티 브랜드를 열거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연봉 1억원 이상은 '루이비통'이나 '베르사체', 5000만원 이상은 신명품으로 떠오른 '오프화이트' MSGM' '톰포드', 그 이하는 엄마가 마트 등지에서 사준 팬티를 입으면 된다는 것이다.
소득 수준에 따라 누군가가 입을 수 있는 의류의 브랜드를 나눈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연봉 1억원 수준의 사람 중에도 아무리 삶아도 변형 없는 품질 좋은 시장 팬티를 입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계급도를 통해 젠지세대가 얼마나 언더웨어에 관심이 많고, 팬티도 명품으로 살 만큼 브랜드를 따지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시 유행하는 팬티 올려 입기
남성 소비자의 팬티를 향한 열정은 새깅 스타일과 새기 팬츠의 재유행으로 연결되고 있다.
새깅 스타일은 1990년대 흑인 힙합 뮤지션이나 스케이트 선수들이 바지를 엉덩이까지 내려서, 속옷 일부를 보이게 하는 옷차림새를 뜻한다. 새기 팬츠는 새깅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는 바지다.
새깅 스타일의 첫 출발은 교도소로 알려진다. 수감자들이 바지가 치수에 맞지 않자, 대충 허리를 졸라매 입었는데 그 바람에 팬티도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새깅 스타일은 '나 감옥에서 나왔다'는 일종의 과시 및 시대의 저항 정신 등과 맞물리면서 유행했다.
팝스타 저스틴 비버는 새깅 스타일을 선호하는 대표적 스타다. 처음에는 팬티 끝부분만 살짝 내비치던 그는, 점차 엉덩이 대부분이 보이는 과감한 새깅 스타일도 소화했다. 실제로 그가 해외에서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팬티를 노출한 채 쇼핑하는 모습이 공개된 적이 있는데, 워낙 파격적이어서 화제가 됐다.
물론 새깅 스타일을 모두가 좋아하는 건 아니다. 40대 직장인 B 씨는 "바지를 내려서 팬티를 보여주는 스타일은 사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옷차림"이라면서 "전혀 멋있지도 않고 다리도 무척 짧아 보여 남자들 중에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고 했다.
명품 브랜드는 '레트로' 열풍이 불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새깅 스타일을 다시 꺼내들고 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발렌시아가'는 2021년 바지에 사각 팬티가 연결된 새깅 스타일의 제품을 출시했다. 바지 안에 남성용 사각팬티를 연결한 방식으로, 팬티가 바지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이지리아 라고스 출신 디자이너 모왈롤라 오군레시가 이끄는 '모왈롤라'는 2023가을·겨울 제품을 공개하면서 엉덩이골을 뛰어 넘어 과감하게 내린 새깅 스타일 바지를 보여줬다. 이밖에도 '프라다' '미우미우' 등이 바지 위로 속옷을 꺼내고 있는 추세다.
새깅 스타일은 과거부터 부침이 많았다.
미국의 일부 주는 새깅 스타일이 불쾌감을 준다면서 법으로 금지했다. 실제로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남부 근교에 위치한 린우드 시는 공공장소에서 3인치 이상 속옷이 보이는 새기 팬츠를 입을 시 벌금으로 25달러를 부과하는 조례안을 승인해 논란이 됐다.
일부에서는 새깅 스타일에 흑인 차별이 담겨있다고 주장한다.
뉴멕시코대학 미식축구 선수인 드션 마먼은 2012년 새기 팬츠 차림으로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비행기를 탑승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마먼은 비행기 탑승 수속 중 승무원과 바지 문제로 다투다 경찰에 체포됐다. 해당 항공사 측은 "성기가 보일 만큼 바지가 내려져 있어 바지를 올려 입으라고 부탁했지만 마먼이 거부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1만1000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마먼은 "험악한 인상에 새기 팬츠를 입은 젊은 흑인 남자이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더웨어 힘주는 브랜드
명품 브랜드와 젠지세대가 팬티에 관심을 갖자 국내 브랜드 및 패션 플랫폼도 속옷 마케팅에 고삐를 쥐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월드클래스 수준의 모델을 거느린 캘빈클라인이다. 캘빈클라인은 블랙핑크 멤버 제니를 여성 모델로 발탁하는데 이어 손흥민(토트넘)을 기용하면서 언더웨어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축구 스타인 손흥민은 조각 같은 몸매를 온전히 드러낸 화보컷을 SNS에 올리면서 브랜드 홍보와 함께 자랑도 열심히 했다. 손흥민의 이 화보 컷은 속옷에 소극적이던 국내 남성 소비자의 욕망을 저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언더웨어를 전개 중인 패션 브랜드 관계자는 "팬티를 보여준다는 것은 유행이기도 하지만, 근사한 몸매를 은근하게 어필하는 패션으로 작용한다"며 "팬티가 자기를 과시하는 의류가 되고 있다"고 평했다.
국내 브랜드도 바쁘게 움직이다. '휠라 언더웨어'는 지난달 스포츠 언더웨어 라인인 '휠라벨로 컬렉션'을 출시했다. 전 제품에 세리프 로고 밴드를 디자인 포인트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속옷 원단에 폐페트병을 재활용한 '에코론', 대나무를 활용한 식물성 지속가능소재인 '뱀부셀' 등을 일부 혼용해 사용하면서 환경과 지속가능성까지 챙겼다. 또 편안한 착용감과 통기성에 디자인까지 힘을 주면서 휠라의 스포티한 느낌을 살렸다.
이랜드월드의 '뉴발란스'는 지난해 1월 남성 속옷 브랜드 'NB 언더웨어'를 론칭했다. 뉴발란스의 패셔너블하고 트렌디한 디자인과 다양한 색상을 적용했는데, 통기성이 뛰어나 땀을 빠르게 흡수하고 건조한다는 설명이다.
에이블리코퍼레이션이 운영하는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에 따르면 올해 2월 에이블리 내 언더웨어 검색량은 전년 동기 대비 80%가량 증가했다. 속옷도 모바일로 선물하는 트렌드가 자리 잡으면서 내 남성 언더웨어 상품 판매 비중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에이블리는 MZ세대 속옷 구매 트렌드가 변화하고 인기가 있자, 지난해 12월부터 브랜드관 내 홈·언더웨어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가 발표한 '한국패션마켓트렌드 2021'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언더웨어 시장 규모는 2020년 구매실적을 기준 2조1076억원이었다. 현재는 여성 속옷 비중이 72.9%로 1조5099억원에 달한다. 업계는 현재 남성 속옷 시장이 4000억~5000억원 수준이지만 앞으로 더욱 성장할 것으로 내다본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부모님과 함께 오프라인 등에서 속옷을 구매했다면, 최근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과 구매 후기 등을 살펴보고 직접 구매하는 추세"라며 "오운완과 '갓생(계획적이며 부지런한 삶)'이 트렌드가 되면서 속옷에 신경 쓰는 남성 소비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서지영 기자 seojy@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