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고나서 충격을 받았던 한국 영화는 ‘부산행’, ‘엑시트’ 입니다. 연출을 비롯해 각본이 뛰어났죠. 이렇게 강력한 각본이 있다면 애니메이션으로도 흥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이런 각본이 만들어지는 나라에서 왜 세계적으로 히트하는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지 않는지, 그게 더 이상해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본 K콘텐츠는 무수한 잠재력을 가진 원석에 가까웠다. 27일 서울 용산구 노보텔 앰배서더 서울 용산에서 만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국내 걸그룹 아이브의 ‘아이 엠’을 일주일째 듣고 있다고 밝힌 그는 “한국의 좋은 애니메이션에 대해 추천도 받고 싶고, 꼭 찾아보고 싶다”며 K콘텐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드러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한국에 각별한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20년 동안 작품을 만들 때마다 한국을 방문했으며,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이 항상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3월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의 경우 국내 일본 영화의 최초 기록을 경신했다. 올해 초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제치고 500만7193명(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28일 자정 기준)을 기록, 대망의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새 역사를 썼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다시 서울을 방문한 이유도 이 이유에서다. 지난달 공식 내한 일정으로 국내 팬들과 만났던 그는 “300만 관객을 돌파하면 다시 한국에 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약속을 지킨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다시 한국을 방문해 “‘스즈메의 문단속’을 이렇게까지 많이 봐주실 줄 상상도 못했다”며 벅찬 소감을 전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일본에서 12년 전 있었던 재해를 그리고 있어 재밌게 봐주실 거라는 자신감은 없었습니다. ‘너의 이름은.’과 달리 일본 사회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많이 봐주셨다고 들어서 안심할 수 있었죠.”
역사·정치적 관점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과 일본이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서로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하나의 사례를 만들어냈다. 신카이 마코도 감독은 “양국이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저항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도 K팝과 K드라마를 많이 좋아하고, 한국도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을 많이 봐주고 계시죠. 국적과 상관없이 대중은 그저 재밌는 것을 즐기고있다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 간의 문화적 장벽도 없어진 것 같고요.”
‘스즈메의 문단속’은 우연히 재난을 부르는 문을 열게 된 소녀 ‘스즈메’가 일본 각지에서 발생하는 재난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문을 닫아가는 이야기다. 지난 2011년 3월 11일 발생해 1만 8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은유 등을 담았다.
지난 1월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열전을 이어갔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슬램덩크’가 인기가 있을 때 ‘스즈메의 문단속’이 개봉해 일본 애니에 대한 관심이 계속 이어진 것 같다”며 “‘슬램덩크’ 덕분에 거둔 성적”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많은 관객들이 사랑해주시는 일본 애니가 장르 자체로서 힘을 갖는 게 기쁩니다. 마치 한국 콘텐츠만의 인기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요.”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 영화라고도 불린다. 전작인 ‘너의 이름은’(2017)과 ‘날씨의 아이’(2019)가 모두 특정한 재난을 소재로 삼고 있어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재난 3부작’ 시리즈를 완성하기까지 걸린 9년의 시간 동안 “제가 사는 장소에 대해 그려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인생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킬 만한 큰 사건을 만난다고 생각하는데, 저에게는 그게 동일본 대지진이었습니다. 큰 피해를 입은 건 아니었지만 제 안의 큰 변화를 겪으며 12년 동안 계속 그 재해를 생각했죠. ‘스즈메의 문단속’은 항상 저의 발밑을 생각하며 만들어낸 그림이에요.”
아쉽게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4부작’이 될 작품은 당분간 제작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음 작품까지 재난과 재해에 대해 다루면 관객들이 질려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다른 테마를 시도해볼까 생각한다”며 색다른 도전을 암시하기도 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특별하다. 은은하고도 아름다운 색감을 활용한 섬세한 작화와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 그림 속에서 피어나는 등장 인물들의 생동감까지.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한 영상미에 고도의 기술이 적용된 듯 보이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옛날 일본이 해오던 방법인 원시적이면서도 장인적인 방법 그대로 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 3D 영화의 CG 수를 보면 1초에 60프레임(정지화면 60장)까지도 사용되지만 그는 아직 1초에 24프레임을 적용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뽑는 자신의 애니메이션 만의 강점은 바로 ‘스피드’다.
“제 애니메이션은 스피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애니에 비해 전개가 빠르고, 그런 부분이 아마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추측하죠. 다만 전개가 빠른 게 싫다고 하는 사람도 많으니,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