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 스캔들’을 하면서 로코(로맨틱 코미디) 여배우에 대한 선입견을 적나라하게 느꼈어요. 아직도 여자 나이를 따지면서 잣대를 들이대는 세상이구나 싶었죠. 오히려 저보다 사람들이 더 나이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배우 전도연이 지난 3월 인기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일타 스캔들’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씁쓸한 말이기도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 50대 여배우의 현실을 꼬집는 대목이기도 하다. 1980~90년대 데뷔한 여배우들은 전성기를 맞은 후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게 되면서 누군가의 엄마로 또는 누군가의 아내로 작품에서 소비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최근 TV드라마 주 시청자층이 50대로 옮겨가면서 방송가도 그 흐름에 맞게 변화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50대 여배우들이 활약이 안방극장에 훈풍을 일으키고 있다. 여배우들 나이에 대한 선입견이 옅어지고 K콘텐츠의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다양해지고 있는 것. 이런 현상은 방송계를 넘어 OTT, 영화계까지 넓게 번지고 있다.
◇ 50대 여배우 안방극장 꽉 잡았다
엄정화는 JTBC 토일드라마 ‘닥터 차정숙’을 통해 또 한 번 전성기를 맞고 있다. 14일 방송된 10회 시청률은 18%(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해 20%를 목전에 뒀다. 엄정화는 그간 쌓아온 연기 내공으로 ‘닥터 차정숙’에서 응원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김희애도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를 통해 저력을 발휘했다. 특히 문소리와 함께 남자 배우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정치물을 훌륭히 소화해내며 40년차 배우의 저력을 드러냈다. 김희애는 지난 2020년 JTBC ‘부부의 세계’에서 시청률 28.4%를 기록하며 JTBC 역대 드라마 시청률 1위를 기록했던 터. 3년 만의 작품임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호평을 받았다.
전도연, 김서형 역시 마찬가지다. 올해로 50살이 된 전도연이 로코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기대와 우려로 나뉘었다. 하지만 전도연의 능력은 언제나처럼 상상 이상이었다. 우려를 깨부수고 4%대에서 시작한 ‘일타 스캔들’ 시청률을 17%까지 끌어올리는 데 커다란 몫을 했다. 전도연은 뒤이어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는 전설적인 킬러 역을 맡아 데뷔 이래 처음으로 강도 높은 액션을 소화, 또 한 번 왜 전도연인지를 입증했다. 김서형은 ENA ‘종이달’에서 숨 막히는 일상을 살다가 은행 VIP 고객들의 돈을 횡령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한 유이화 역을 맡아 호평을 샀다. 49살인 라미란은 JTBC 드라마 ‘나쁜엄마’에서 아들을 향한 애틋한 모성애를 그려내며 매회 진한 감정 연기를 선보이며 작품의 인기를 앞에서 이끌고 있다.
◇ ‘여성 서사’ 급증 이유는?
중년 여배우들의 활약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데 대해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었다. 유리천장은 아직도 존재하지만, 지금의 여성들은 활동량이 늘고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 몫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면서 “여성 서사가 부각되는 건 이런 사회적 분위기상 당연한 수순”이라고 말했다. 또한 엄정화, 김희애, 전도연 등 50대 여배우들이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이들의 연기를 보면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는 게 공 평론가의 설명이다.
대다수 K콘텐츠가 남성 중심 서사 작품들이었던 만큼, 소재의 한계가 다가오자 여성들의 서사에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공 평론가는 “과거엔 대부분이 남성 중심의 서사들이 많았다. 소재의 빈곤이 오다 보니 ‘여자들의 이야기도 있네?’라는 전환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이 같은 변화는 같은 상황을 여자의 시선과 남자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새로운 시선으로 보다 보니 드라마가 새롭게 보여질 수가 있다”고 설명했다.
미디어의 중심축이 달라지고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각 플랫폼마다 시청자층이 달라진 것도 이런 변화를 이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TV드라마와 OTT, SNS 등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각 플랫폼에 맞는 이야기가 준비되면서 여배우들의 더 많은 기회가 생겼다는 것.
조성경 드라마 평론가는 “플랫폼이 늘어나고 다양해지면서 제작 편수가 많아지다 보니 연기력 좋고 인지도 높은 여배우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야기들이 제작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경제 활동의 주축이 40, 50대로 이동하면서 드라마가 그런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란 분석도 있다. 현실적인 4050세대의 이야기를 반영하려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또래 여배우들이 중심이 되는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X세대가 대중의 주축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사회 현상이 반영된 것”이라며 “50대 여배우들은 그런 점에서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