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김창훈 감독의 ‘화란’은 의붓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년 ‘연규’(홍사빈)가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송중기)을 만나 위태로운 세계에 함께 하게 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누아르다.
‘신세계’, ‘무뢰한’, ‘아수라’, ‘헌트’ 등 강렬한 폭력의 세계를 그려온 제작사 사나이픽처스가 신예 김창훈 감독의 시나리오로 만들었다. 시나리오에 반한 배우 송중기가 노캐런티로 참가 의지를 보이면서 제작에 박차가 가해져 화제를 모았다. 김창훈 감독은 이번 칸 폐막식에서 탁월한 신인감독에게 주는 ‘황금카메라상’ 후보이기도 하다.
의붓아버지가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떠나 네덜란드(화란)로 이민 가고자 하는 고등학생 연규는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민에 필요한 돈을 악착같이 모은다. 연규가 살아가는 ‘화란’의 세계는 안으로는 가정폭력이 정도를 넘어섰고, 바깥으로는 살인과 비리와 폭력이 난무한다. 연규는 가정폭력이 일상이 된 의붓아버자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지만 맞고 견디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친딸인 하얀(비비 김형서)의 만류에도 아버지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마음 둘 곳 없는 연규는 말로는 틱틱거리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의붓동생인 하얀을 아끼고 의지한다.
한편 폭력 조직 중간 보스 치건은 자신의 과거 모습처럼 보이는 연규에게 끌림과 동시에 안쓰러움도 느낀다. 연규가 처해진 경제적 문제와 난관을 알게 된 치건이 그가 갚지 못할 삼백만 원이라는 돈을 던져주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연규는 늘 술에 쩔어 야구방망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지독한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에게 벗어나 조직에 들어가기로 고민 끝에 결심한다. 연규는 한발한발 폭력의 정점에 다가가면서 조직의 인정을 받게 된다. 채권추심일을 하던 연규는 어느 날 동네에서 혼자 노는 어린 소년에게 자신의 어릴 적을 보는 것 같은 안쓰러움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그 소년의 아버지가 바로 연규가 몸담은 조직의 돈을 빌린 채 갚지 못하고 있는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던 것. 그의 유일한 생계 수단인 오토바이를 훔쳐야만 했던 연규는 어린 소년에 대한 연민으로 오토바이를 되돌려 주게 된다.
연규는 이 사건으로 치건과 상당한 갈등을 빚는다. 치건은 이 세계에서 무슨 오지랖 넓은 동정이냐며 호되게 연규를 나무라며 조폭들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에게 고통을 가한다. 치건은 연규에게 자행한 똑같은 고통을 자처하면서 그만큼 그를 아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이야기 구조가 상당히 조직적이다. 치건이 연규에게 연민을 느끼고 아껴주는 메인 플롯은 연규가 장애인의 아들인 어린 소년에게 연민을 느끼는 서브 플롯을 만나 비정한 세계에서도 내재해 있는 정이라는 주제를 강화한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에서 조폭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은 막둥이(한석규)의 운명적인 선택이 비장미를 주듯이 ‘화란’에서의 연규와 치건의 운명적인 선택은 가슴 깊은 울림을 남긴다. 홍사빈, 송중기, 김형서의 각자 개성 있는 연기는 이 영화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희망 없는 세상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아무리 견디기 힘든 고통도 사람 사이의 정과 의리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강조하고 있다. 우리 곁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삶은 살아갈 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