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라고 언제까지 청순하겠어요. 대중이 알고 있는 ‘명세빈’에서 벗어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감독님이 절 캐스팅 해줘서 너무 고마울 따름이에요. 하하.”
배우 명세빈은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 출연 계기를 묻자 이처럼 말했다.
명세빈은 최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닥터 차정숙’에서 자신이 연기한 최승희에 대해 “승희라는 사람의 당당함과 그 안에 있는 상처를 표현하고 싶었다”며 “‘나는 불륜녀야. 창피해’가 아니라 승희가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타당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연기했다. 보시는 분들도 마냥 승희를 욕할 수만은 없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90년대 커피 CF에서 ‘저 이번에 내려요’라는 명대사로 당대 ‘청순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명세빈이다. 그 뒤로 주로 청순한 역할을 맡아왔지만 그는 ‘닥터 차정숙’로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주인공 차정숙(엄정화)의 남편인 서인호(김병철)의 불륜 상대자이자 홀로 딸을 키우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최승희 역을 맡아 복합적인 감정들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닥터 차정숙’은 20년 차 가정주부에서 1년 차 레지던트가 된 차정숙의 찢어진 인생 봉합기를 그려낸 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 명세빈은 불륜녀임에도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짠함’을 불러일으키며 호평받았다.
“보시는 분들도 마냥 승희를 욕할 수만은 없었을 것 같아요.”
극중 최승희는 대학생 시절 서인호와 연인관계였다. 그러나 서인호가 차정숙과 혼전임신으로 결혼하며 배신당한다. 이후 미국 레지던트 과정 중 인호를 다시 만나게 되고, 정숙과 결혼한 사실을 알면서도 아이를 낳는다. 그렇게 얻은 딸이 은서다.
명세빈은 승희에 대해 “잘 나가는 집안에 결핍이라곤 없던 친구가 유일하게 생긴 결핍이 서인호였다. 딸 은서에게 아빠가 없다는 죄책감과 동시에 남편의 빈자리를 느끼는 내면의 외로움이 많은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이어 “드라마에서 표현이 많이 되지 않았다. 최승희와 서인호는 첫사랑의 감정을 넘어 소울메이트 같은 느낌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결핍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며 “승희에게는 첫사랑이 다른 여자와 원나잇을 해서 아이를 가지는 바람에 자신이 버림 당하지 않았나. 부족한 게 없던 승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명세빈이었다면 최승희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느냐는 질문에 잠시 웃어 보이더니 “한국에 있을 때와 외국에 있을 때는 마음이 다를 수 있을 것 같다”며 “만약 저였다면 미국에서 만났을 때 거기서 브레이크를 걸었을 거다. 아이가 생길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답했다.
‘최승희’라는 캐릭터를 부족함 없이 연기했던 명세빈이지만 사실 그는 ‘킬미, 힐미’(2015), ‘다시, 첫사랑’(2016) 등 줄곧 청순하고 단아한 캐릭터를 맡아왔다. 그에게 불륜녀이자 미혼모인 최승희 캐릭터에 대해 어려움은 없었느냐고 물으니, 촬영 당시 선배이자 평소 존경하던 엄정화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고 밝혔다.
“대본을 받자마자 정화언니한테 달려갔어요. ‘언니는 승희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으면서 서로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죠. 또 촬영 당시 언니 대사량이 보통 많은 게 아닌데 전부 소화해 내는 걸 보고 자극도 많이 받았어요. 아마 언니가 없었다면 최승희 캐릭터도 없었을 거예요.”
지난 4일 ‘닥터 차정숙’은 18.5%의 높은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 예상했느냐는 질문에 명세빈은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닥터 차정숙’은 제 인생 후반부에 열린 새로운 문 같은 작품이에요. 불륜녀 캐릭터를 처음으로 도전하면서 두려움도 많았죠. 그런데 너무 다행인 건 시청자 분들이 미워하시기보단 오히려 저를 응원해 주시더라고요. 저번엔 혼자 카페에 있었는데 아주머니들께서 ‘최승희 파이팅!’이라고 외쳐주셨어요(웃음).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승희의 이미지가 ‘닥터 차정숙’에서 잘 보인 것 같아 뿌듯한 순간이었죠.”
1996년 신승훈의 ‘내 방식대로의 사랑’ 뮤직비디오를 통해 데뷔한 명세빈은 어느새 데뷔 30년 차를 앞두고 있다. 명세빈은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게 연기를 오래 할 수 있었던 나름의 비결이지 않을까 싶다”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도 있잖아요. 이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주연에서 밀리는 것에 매달리지 않았고, ‘어떤 일이 와도 열심히 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연기한 것 같아요. 새로운 기회가 어떻게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고 아니겠어요? 앞으로도 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연기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