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눈의 광인.’ 반짝이는 눈을 갖고 있지만, 알 수 없는 광기가 느껴지는 사람을 뜻한다. 게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영화 ‘귀공자’에도 이런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스리피스 수트에 한정판 명품 구두를 신고, 누구냐는 질문에 항상 “친구”라고 대답하는 귀공자 역의 김선호 이야기다.
영화는 병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필리핀의 불법 격투기 경기장을 전전하는 마르코(강태주)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마르코는 한국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아버지의 소식을 듣게 되고, 어머니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한국 땅을 밟기도 전, 선한 미소를 가진 의문의 남자 귀공자가 그에게 접근해 자신을 “친구”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귀공자’는 이유도 모른 채 쫓기는 한 남자와 그를 집요하게 쫓는 귀공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귀공자는 마르코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영화는 추격 액션인 만큼 둘의 추격전이 대부분인데 울창한 숲, 도로, 마을, 터널 등 공간에 변화를 줘 지루함을 줄였다.
카체이싱, 와이어, 총격 등 강렬한 액션도 보는 재미가 있다. 높은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와이어 액션부터 귓가를 찌르는 총성, 도로를 질주하는 카체이싱 장면은 지루할 법한 순간에 등장해 정신을 바짝 들게 한다. 특히 마르코, 귀공자 두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됐던 이야기에 한 이사(김강우), 윤주(고아라)가 개입하면서 극에 풍성함을 더한다. 이 과정에서 극 초반, 관객들에게 주어진 의문점들이 모두 회수된다.
영화의 백미는 후반부인데, 김선호의 액션이 놀랍다. 김선호는 주먹부터 칼, 총 등 무기를 가리지 않고 모든 액션을 쏟아낸다. 김선호가 중간중간 던지는 유머 섞인 대사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사생활 문제로 활동을 중단했던 김선호를 품고 간 박훈정 감독의 선택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선한 얼굴을 광인으로 바꾸는 박 감독의 특기가 ‘귀공자’에도 잘 묻어나 있다.
무엇보다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김선호는 ‘맑은 눈의 광인’의 정석을 보여준다. 김선호가 연기한 귀공자는 술 대신 콜라를 마시고, 편안함 대신 단정한 수트와 흐트러짐 없는 머리를 추구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김선호는 방해되는 이들을 웃는 얼굴로 죽이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귀공자 캐릭터를 삼킨 듯 그려냈다. “난 프로거든”이라며 타깃을 끝까지 쫓아가는데, 그 와중에도 웃는 모습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재벌 2세 한 이사 역의 김강우와 의문의 여자 윤주 역의 고아라도 제 몫을 톡톡히 해낸다. 김강우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 김선호에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고아라는 지금까지 시도한 적 없는 캐릭터를 통해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198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박훈정 감독의 선택을 받은 강태주도 눈에 띈다. 극중 마르코 역을 맡은 강태주는 ‘코피노’(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고 갖은 수모를 겪는다. 강태주는 마르코의 흔들리는 감정, 불안한 눈빛을 안정감 있는 연기로 표현해낸다. ‘마녀’ 시리즈의 김다미, 신시아에 이어 새로운 신예를 발굴한 박훈정 감독의 선택에 박수를 보낼 만하다.
다만 부족한 개연성이 아쉽다. 귀공자가 어떻게 매 순간 마르코가 있는 곳에 나타날 수 있는지 정확한 설명이 없다 보니 이해하기가 어렵다. 또 영화의 대부분이 쫓고 쫓기는 내용인데,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