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겼는데 뒷맛이 썩 개운치는 않다. 여전히 경기력은 의문부호가 잔뜩 남아 있다. 급한 불만 껐을 뿐 클린스만호엔 여전히 잔불이 남아 있다. 여섯 경기 만에 거둔 첫 승에 심취해 있을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13일(한국시간) 영국 뉴캐슬의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평가전에서 1-0으로 이겼다. 클린스만 감독 부임 후 5경기 연속 무승(3무 2패) 행진이 마침내 끝났다. 이번에도 승리하지 못하면 경질설이 본격적으로 대두될 것이라는 게 축구계 공통된 전망이었는데, 벼랑 끝에 섰던 클린스만 감독도 가까스로 숨을 돌리게 됐다.
클린스만 감독은 닷새 전의 웨일스전 선발 라인업을 사실상 그대로 유지했다.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소집돼 먼저 귀국길에 오른 홍현석(KAA 헨트) 대신 황희찬(울버햄프턴)이 측면에 배치된 게 유일한 변화였다. A매치 평가전 2연전을 치르는 동안 선발 명단에 변화를 거의 주지 않는 건 이례적이다. 실험보다 최정예 멤버를 선택했다. 결과를 반드시 잡아야 하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선택이었다.
선수들의 세부적인 움직임은 조금이나마 정상을 되찾았다. 웨일스전에서 팀 전술 탓에 중원까지 깊숙하게 내려왔던 손흥민(토트넘)은 이날 공격에 더 초점을 맞췄다. 중앙 지향적인 홍현석을 배치했던 측면엔 황희찬이 서서 저돌적인 드리블과 슈팅 등으로 공격에 힘을 보탰다. 전반 32분엔 상대 수비수가 잘못 걷어낸 공이 문전으로 튀어 오르자 조규성(미트윌란)이 헤더 선제골로 연결하며 리드를 잡았다. 이 골은 클린스만호의 출범 첫 승을 이끈 결승골이 됐다.
그러나 무승 기록을 끊어낸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는 어려웠다. 한국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28위, 사우디는 54위다. 사우디는 이날 경기 전까지 A매치 5연패의 늪에 빠져 있었을 만큼 흐름도 좋지 못했다. 이날 슈팅 수는 19-7(소파스코어 기준)로 한국이 크게 앞섰다. 애초에 전력 차가 그만큼 컸던 경기였다는 뜻이다.
경기 내용 면에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컸다. 출범 내내 이어지고 있는 클린스만 감독의 ‘무색무취’ 전술은 이번에도 이어졌다. 과연 어떤 축구를 추구하는지는 이번 경기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없었다. 슈팅 수가 많았던 건 전술이 좋았다기보다 상대 부진에 따른 반사이익에 가까웠다. 19개의 슈팅 가운데 단 1개만 득점으로 연결했고, 이마저도 행운이 따른 골이었다는 점 역시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많은 슈팅을 허용하지 않았는데도 결정적인 위기가 많았던 것도 전술적으로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비와 골키퍼 간 호흡이 맞지 않아 허무하게 실점을 허용할 위기도 있었고, 후방에서 잦은 패스미스로 상대에게 역습 기회를 허용하는 장면도 수차례 나왔다. 꾸준히 지적됐던 풀백들의 움직임 역시 여전히 어정쩡했다.
전·후반 크게 달랐던 경기력도 짚고 갈 부분이다. 이날 한국의 슈팅 수는 전반 12개에서 후반 7개로 크게 줄었다. 이마저도 지공이 아닌 역습이나 세트피스 슈팅이 대부분이었다. 사우디를 상대로 웅크린 채 수비에 무게를 두다 간간이 기회를 만드는 정도로 흐름을 내줬다. 후반 교체로 투입된 선수들의 영향력도 미미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부임 후 여섯 경기째 확실한 전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클린스만 감독의 전술적 역량에 대한 의문 부호도 여전하다. 한국은 다음 달 튀니지·베트남과의 평가전을 끝으로 북중미 월드컵 예선과 아시안컵 등 본무대에 나서야 한다는 점에서 결코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다.
한국에 상주하지 않고 주로 미국 자택에 머물러 '재택근무 논란'이 있는 클린스만 감독은 14일 오후 K리그 소속 선수들과 함께 귀국한다. 당초 클린스만 감독은 유럽에 남아 분데스리가 경기를 관람하고 관계자 미팅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A매치 명단 발표 전에 K리그 선수를 먼저 확인하는 것으로 일정을 바꿨다.
그러나 이마저도 클린스만 감독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닌 대한축구협회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클린스만 감독 스스로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계속 논란의 중심에 선다면 이미 크게 돌아선 팬심을 돌리기는 쉽지 않다. FIFA 랭킹 54위 사우디에 ‘진땀승’을 거둔 것만으로도 분위기 반전을 기대했다면 큰 오산이다. 클린스만 감독은 물론 대한축구협회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