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눈을 반짝이면서 시청했던 ‘인생 만화’ 한 편쯤은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요?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세계관이지만, 만화 속 인물들과 스토리에 우리의 삶은 더 즐거워지거나 위로를 받기도 하죠. ‘더쿠미’는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누구나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장르의 만화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청춘은 상냥하지만은 않다. 아프지만도 않다. 씁쓸한 청춘 군상극.”
‘빙과’는 소설이 원작이다. 2001년 첫 출간된 요네자와 호노부의 추리 소설 ‘고전부 시리즈’ 1권부터 4권(빙과, 바보의 엔드크레디트, 쿠드랴프카의 차례, 두 사람의 거리추정)까지의 내용이 2012년 총 22편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빙과’를 검색하면 미스터리 혹은 추리물 장르라는 설명이 나오지만, 추리소설에 꼭 등장하는 살인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미스터리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담백한 사건들이 이상하게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카미야마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오레키 호타로는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 해야 되는 일은 간략히 한다”는 좌우명을 가진 고교생이다. 한마디로 극강의 ‘에너지 절약자’지만, 호타로는 동아리 폐부를 막아달라는 누나의 간곡한 부탁으로 고전부에 들어가게 된다. 혼자서만 고전부를 운영하게 될 것이란 예상과 달리, 호타로는 고전부 부실에서 치탄다 에루라는 소녀를 운명처럼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 호타루의 절친 후쿠베 사토시와 호타루와 같은 중학교 출신인 여학생 이바라 마야카까지 총 4명이 입부하면서 고전부는 폐부 위기를 면한다.
그런데 이 4명의 학생이 뭉칠 때마다 고전부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긴다. 갑자기 교실 문이 잠기거나, ‘무당거미회’라는 비밀 클럽의 정체를 쫓거나, 선배들이 만든 영화 속 범인의 정체를 밝혀달라는 제보가 들어오기도 한다. 남 일에 무관심한 호타로는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그냥 지나치고만 싶다. 하지만 치탄다의 “저, 신경쓰여요!”라는 한 마디에 호타로는 어쩔 수 없이 비상한 추리력을 발휘하며 사건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간다. ‘에너지 절약자’였던 그의 삶이 송두리째 달라진 것이다.
‘빙과’의 흐름은 잔잔하고 느리다. 사건의 실체를 쫓는 과정이 긴박하지도 않고, 사건의 해답이 드러날 때도 특유의 평화로움을 유지한다. 그 이유는 ‘빙과’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고교 생활의 일부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빙과’는 사건 안에 인물들의 세밀한 심리를 부족하지 않게 채워 넣는다.
호타로는 잿빛으로만 여겼던 자신의 고교생활이 어느 순간 장밋빛으로도 물들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닫는다. “아뇨. 이제 봄이랍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알록달록한 치탄다를 통해서다. 사토시는 머릿속에 무수한 정보만 간직하고 있는 자신과 달리 명확한 답을 내리는 호타로에 동경을 넘어선 질투, 무력감까지 느낀다. 그럼에도 사토시는 호타로와의 우정의 끈을 놓지 않는다. “데이터베이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해”라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호타로의 쓸쓸함을 유일하게 이해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고전부 멤버들의 관계로 호타로, 치탄다, 사토시, 이바라는 함께 변화하고 성장한다. 청춘의 시기에만 겪을 수 있는 경험이기에, 시시한 사건과 미세한 감정까지도 모두 특별하고 소중하게만 보인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있었다. 이미 지나간 고전일 뿐이고, 내 청춘은 형형색색으로 물들지 않은 것 같아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들지만 말이다. 헛헛함만 밀려드는 내 청춘의 기록에 ‘빙과’는 작은 위로를 건넨다. 무채색 안에도 빛나는 순간은 분명 있었고, 그 회색의 세상마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청춘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