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있었어요. 약한 모습 보여주는 게 수치스러웠거든요. 이제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아요. 내가 약한 존재인 걸 인정해야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진리에게’ 설리)
그룹 에프엑스 출신 고(故) 설리가 영화 ‘진리에게’에 출연했던 이유다. 편협하고 날카로운 시선에 매 순간 평가받아야 했던, 평범하고 싶었던 20대. 고작 스물다섯의 나이에 눈을 감은 설리의 유작이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진리에게’는 본래 넷플릭스 ‘페르소나: 설리’로 기획했던 작품이다. 배우이자 가수로서의 설리와 스물다섯의 최진리가 그 시절 느꼈던 다양한 일상의 고민과 생각을 인터뷰 형식으로 전하는 다큐멘터리다. 2019년 하반기부터 촬영돼 2020년 공개 예정이었으나, 2019년 10월 설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제작이 중단됐다.
설리의 유작 ‘진리에게’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뜨거운 감자였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다는 소식이 알려진 후, 고인을 이용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와 작품의 진정성에 따라 고인을 추억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기에 치열한 티켓팅이 예상됐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오픈된 일반 예매는 1분 만에 매진됐고 영화제 기간에 기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시사회 티켓도 순식간에 동이 났다.
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스크린에 나타난 설리의 생전 모습을 본 팬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떠나간 이에 대한 그리움, 미안함 여러 감정이 극장을 가득 메웠다.
영화는 설리와 진행했던 생전 인터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설리는 예쁘다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시기와 질투, 어린 나이에 데뷔해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대중의 시선, 페미니스트 선언 후 겪어야 했던 상황들에 솔직하고도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씩씩하지만 신중하게 답변을 이어가던 설리는 악플러를 선처했던 때를 떠올리다 결국 눈물을 보였다. “사과를 받는 것조차 상처로 다가왔어요”라는 예상치 못한 대답과 함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설리가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던 일. 바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도 바뀌는 상황이 없기에, 자기 탓을 하기 시작했고, 자기를 상처입혔고,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통제였다고 토로했다.
정윤석 감독은 설리를 아티스트로서 조명해야 진정한 추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정 감독은 설리의 삶을 그의 마지막 곡 ‘도로시’(Dorothy)에 비유했다. ‘도로시’는 설리가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인 2019년 6월 발매한 솔로 앨범 ‘고블린’(Goblin)의 수록곡이다. 도로시의 여정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노란 벽돌길’, ‘에메랄드 시티’, ‘도로시의 구두’, ‘오즈의 마법사’, ‘캔자스시티’ 챕터별로 나눠 그려냈다.
마지막 장면에서 도로시는 바다를 지나 하늘로 올라간다. 정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진리에게’ 상영 후 열린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캔자스시티’는 도로시의 고향이라며 “설리도 우리 곁을 떠났지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한다”며 연출 의도를 밝혔다.
고인을 화자로 한 만큼 ‘진리에게’는 수많은 검증을 거쳐 공개됐다. 정윤석 감독이 GV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편집 과정부터 여성 인권 변호사와 정신의학과 전문의에게 자문을 받았다. 정 감독은 유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것도 우선에 뒀다고 토로했다. 13살 아역배우 시절부터 사후 관계자들 인터뷰까지 꼼꼼히 살폈다는 그는, 고인의 유작을 책임지는 사람인 만큼 누구보다도 조심스럽게 담아내고 싶었던 듯 했다.
‘진리에게’는 작품을 둘러싼 상황으로 영화가 추모가 아닌 이슈 거리로 소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리에게’가 그 시절 설리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아낸 것만은 분명하다. 비단 한 여성의 죽음만을 다루는 것이 아닌 올바른 추모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설리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여성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 성평등 문제 등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진리에게’는 진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분을 그리워하는 이 땅의 수많은 진리들을 위한 영화입니다. 이름처럼 참된 이치, 진리 자체로 의미 있는 영화가 될 거 같았습니다. 연출자로서 생각하는 진정한 추모의 시작은 주인공의 말 안에서 나의 삶, 우리의 삶을 잘 돌아보는 겁니다. 그 안에서 어떤 역할과 실천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