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만 되면 잘 하던 정수빈(33·두산 베어스)이 올해는 정규 시즌까지 활약한 후 포스트시즌(PS)에 도착했다. 과연 그 이상의 활약도 가능할까.
정수빈은 2023 KBO리그 정규시즌을 39도루(1위)로 마감했다. 그가 KBO리그 공격 부문 공식 타이틀을 따낸 건 2009년 데뷔 이후 처음이다.
공격 부문 8개 중 가장 중요성은 떨어지지만, 여전히 도루왕이 가진 상징성은 크다. 특히 박찬호(KIA 타이거즈)를 위시한 20대 선수들이 주로 따오던 타이틀이라 의미가 크다. 올해도 박찬호와 LG 트윈스의 깜짝 스타 신민재가 9월까지만 해도 선두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박찬호가 부상으로 이탈하고, 신민재가 부진하면서 도루 기회 자체가 줄어든 사이 정수빈이 빠르게 치고 나가 최종 승자가 됐다.
정수빈의 이미지만 생각하면 도루왕 자체가 놀랍진 않다. 2009년 데뷔했을 때부터 수비와 주루 재능 덕에 빠르게 1군에 자리 잡았던 그다. 통산 도루 개수도 275개에 달한다. 한 번쯤 받아봤을 거라 생각됐을 수 있으나 14시즌 중 단 한 번도 없었던 타이틀이다.
그 타이틀을 서른 세 살인 올해 따내 의미가 더 컸다. 30대 중반에 접어드는 나이기도 했지만, 대형 FA(자유계약선수) 계약을 맺은 후 부진했던 그였기에 자존심을 제대로 회복할 수 있는 성적표다.
정규시즌 막판 본지와 만난 정수빈은 "올해는 많이 뛰어 보려고 했다. 목표로 30개 정도를 잡아 놓고 있었다. 그러다 시즌 막판에 오면서 경쟁자인 신민재와 격차가 많이 나지 않았다"며 "시즌 후반 타이틀에 본격적으로 도전해보려고 했고, 다행스럽게도 적은 차이로 1위가 됐다. 생각지도 못했던 도루왕을 받게 된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도루왕은 정수빈의 가치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타격 성적도 개인 커리어하이다. 타율 0.287 75득점, 출루율 0.375와 OPS(출루율과 장타율의 합) 0.746 등을 기록했다. 통산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을 제공하는 스탯티즈 기준 시즌 3.89로 커리어 중 가장 높다. 3할 타율을 기록한 적도 있지만, 풀 시즌을 꾸준히 활약해 준 건 올해가 처음이다. 데뷔 후 첫 올스타전을 경험하는 등 여러모로 의미 깊은 한 해다.
정수빈의 부활에는 개막부터 그를 줄곧 테이블세터로 중용한 이승엽 감독 뚝심이 크게 작용했다. 이 감독은 지난해까지 부진했던 정수빈의 과거로 그를 낮춰 보지 않았다. 캠프에서 직접 확인한 부분을, 그리고 좋았을 때 모습을 믿고 그를 쭉 기용한 결과 대체 불과 1번 타자로 그를 되살렸다. 양의지, 양석환을 제외 타자들의 기복이 심해 득점에 어려움을 겪었던 두산은 정수빈 덕에 최소한의 득점 공식은 지켜낼 수 있었다.
정수빈이 필요한 건 지금부터다. 두산은 19일 창원 NC파크에서 열리는 2023 와일드카드(WC) 결정전에서 NC 다이노스와 맞대결을 펼친다. 19일 1차전에서 승리하면 20일 2차전이 기다린다. 모두 이길 때만 준플레이오프 진출이 가능하다. 2015년 WC 도입 후 그 어떤 5위팀도 준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했다.
2015년 한국시리즈(KS) MVP(최우수선수)였던 정수빈의 활약이 필요한 순간이다. PS 통산 타율 0.296 OPS 0.792를 기록한 그는 중요할 때마다 PS의 영웅으로 등장하며 정가영(가을 영웅)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특히 두산이 왕조의 문을 연 2015년 KS에서는 타율 0.571로 우승을 이끌었고, 2019년과 2020년에도 타율 0.375, 타율 0.348로 맹타를 쳤다. 이어 두산이 WC 팀(4위 진출)으로는 첫 KS에 오른 2021년, 그는 WC(타율 0.364) 준플레이오프(타율 0.462) 맹활약으로 팀의 미러클을 이끌었다. 두산의 기적에는 언제나 정수빈이 있었다.
다시 기적이 필요한 순간이다. 부진했을 때도 가을만 되던 살아났던 정수빈이 가을에서도 '커리어하이'를 기록해준다면, 두산이 첫 WC 업셋이라는 새 역사를 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