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갓 태어나 하는 일은 울음이 전부입니다. 자신을 돌봐달라는 표현입니다. 배고프다고, 기저귀가 젖었다고, 잠을 잘 수 없다고, 혼자 있는 게 무섭다고 웁니다. 돌봄을 받아 울음의 원인이 사라지면 웃습니다. 그러니까, 웃음은, 울음과 달리, 주변에 널리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사람에게 빙긋 웃습니다.
포유류는 젖을 떼면 대체로 바로 독립을 합니다. 인간은 세 살 무렵에 젖을 떼지만 그때에 바로 독립을 하지는 못 합니다. 심리적으로 젖을 뗀다는 일곱 살(심리적 이유기)에도 부모에 반항하며 독립 의지를 불태우지만 겨우 또래 집단과 어울릴 뿐입니다.
인간은 기나긴 사회화 과정를 거치도록 진화하였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독립 시기는 늦추어집니다. 독립하여 먹고살기 위해서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들이 점점 고도화하는 탓입니다. 대한민국 기준으로 보면 2000년대 인간의 보육 기간은 30년 정도 됩니다.
적어도 서른이 넘으면 어른이고, 그러니 ‘자신을 위한 울음’은 멈추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초원의 사자나 하늘의 독수리처럼 당당히 혼자서 세상을 이겨나가는 이들도 물론 있기는 합니다만, 대부분의 인간은 평생을 웁니다.
나이가 들면서 어린아이처럼 아무나 듣게끔 울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보살펴줄 만한 사람이 곁에 있어야 그를 의식하며 웁니다. 또 특별난 경우가 아니면 눈물과 소리까지 보이면서 울지는 않습니다. 속으로 웁니다.
우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따뜻하게 다독여 울음을 거두게 하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가족이나 이웃, 친구가 울음의 사정을 들어주었습니다. 자신을 보살펴줄 것이라는 신뢰는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자신의 울음을 들려줄 만한 사람이 여러분 곁에 얼마나 있는지요. 1960년대 이전만 해도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삼촌 고모 사촌 등의 피붙이가 다같이 사는 마을이 있었지요. 한 동네에서 태어난 또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친구였고요.
대한민국은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단 30년 만에 산업화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그 짧은 기간에 부자가 된 것은 맞습니다. 대신에 혈연 공동체와 지연 공동체가 사라졌습니다. 인간 관계가 잘게 쪼개져서 현재는 1인 가구 30%의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위로가 필요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어느 시대에 살든지 간에 위로가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위로를 해주는 사람이 주변에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회”가 아니라 “위로를 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사회”입니다.
타인이 위로를 받으면 자신도 위로를 받는 것처럼 느낍니다. 콘텐츠 생산자들은 이를 이용하여 대중에게 위로를 팝니다. ‘위로 전문가’가 등장하여 울음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인문학과 예술, 심지어 과학까지 위로에 복무해야 한다는 분위기입니다.
인간은 나약합니다. 다들 성숙한 어른인 척하지만 한 꺼풀을 벗기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그러니, 위로는 필요합니다. 저도 필요합니다. 위로를 받기 이전에 왜 위로가 필요한지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자신을 울게 만드는 마음의 상처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아시는요. 저는 모릅니다. 내 마음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이 선한지 악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직 나를 모릅니다. 다만,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바람을 쐬어주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바람은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습니다. 문득 불었다가 문득 그칩니다.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바람은 빈 채로 세상을 스치듯 지나갈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울고 싶으면, 바람의 노래를 들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