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합심 칼럼을 위해 스포츠 기사를 많이 읽습니다.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그 맥락까지 파악하고자 노력합니다.
진심을 어떻게 말로 담아내는지를 살피며 제가 얻는 즐거움이 큽니다. 짧은 코멘트이지만 그 속에 각자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표현을 발견할 때 그렇습니다.
솔직한 자기 기분과 감정, 생각, 관계 등을 정리해 꺼낸다는 건 내공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많은 깨달음이 있었구나’ 싶습니다. 그런 말은 생각의 결정체입니다. 그럴 때 반갑고 드러내 줘 고마운 마음이 생깁니다. 심리학, 멘털 코칭, 행동과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주제로 이어주는 힌트처럼 또한 느껴집니다. 개인의 경험이 모두의 지혜로 연결되면 더 넓은 관점에서 살펴보게 해줍니다.
최근 제가 읽은 스포츠 현장의 말 중에서 나누고 싶은 몇 가지를 나눠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프로야구 구자욱(삼성 라이온즈) 선수의 골든글러브 수상 후 인터뷰입니다. 구 선수는 팀 선배 오승환 선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승환이 형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힘들 일 있을 때마다 나를 불러내 같이 걷곤 했다. 좋은 말도 많이 해주시고, 내가 워낙 예민한 성격인데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신다. 올해 이런 시간이 많았는데 정말 감사했다.”
‘오승환 선수의 존재감이 이랬구나, 구 선수가 선배에게 많이 의지했구나’라고 이해하게 되네요. 특히 ‘같이 걸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부분에 눈길이 갑니다. 걷기는 일종의 움직이는 명상입니다. 명상 전문가인 나우코칭 김범진 대표는 “걷기는 가벼운 명상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생각에 휩싸여 가만히 명상하기 어려운 분들에겐 걷기를 추천해요. 천천히 걷는 리듬 속에 있다 보면 복잡한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효과가 있어요. 많은 철학자들이 산책을 한 것과 비슷한 이유”라고 김 대표는 덧붙입니다.
과학적으로 봐도 몸을 움직이면 판단과 결정을 하는 뇌의 전전두엽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과정으로 설명됩니다. 적당한 운동의 리듬, 시각적으로 자극적이지 않는 환경 등이 갖춰지면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기 좋은데 산책, 걷기가 딱 맞는 조건이겠죠.
오승환과 구자욱, 선·후배가 나란히 동네를 산책하는 모습을 여러분과 같이 떠올려 보겠습니다. 선배는 야구장에선 돌직구를 던지는 베테랑 투수이지만 둘만의 ‘동네 야구’를 할 땐 포수가 되네요.
후배의 감정이란 낙차 큰 변화구를 잘 받아주는 그런 캐처(catcher)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포수 오승환의 사인은 바로 공감의 메시지 아닐까요. 사실 두 선수의 대화에는 얼마나 많은 이슈와 내용이 있었겠습니까. 경기의 복기부터, 주장이 된 구 선수의 부담감, 선수-코칭스태프-구단 관련 여러 이슈까지.
그렇지만 후배의 마음에 남은 두 사람 산책 대화의 결정체는 무엇입니까. 공식 인터뷰 이후 굳이 미디어 앞에서 “생방송이라 수상 소감에서 못한 말이 있는데요”라고 말을 보태는 구자욱 선수의 코멘트 중 “그럴 수도 있지”가 저는 참 인상적으로 들렸습니다. 경험 많은 선배는 조언과 가르침도 줬겠지만 후배 말을 우선 받아주는 역할에 신경을 쓴 것 같습니다. 후배도 대선배의 포용과 인정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네요. 올 시즌 성적도 그렇고, 고비를 넘긴 비결을 진심으로 소개하며 고마움을 표현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렇습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 대학 캠퍼스를 걸으며 회의하기를 좋아했다고 하죠. 철학자 니체 역시 “진정 위대한 생각은 걸을 때 나온다”고 했습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산책을 하며 토론을 즐겨 했기에 ‘소요학파’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입니다.
스포츠는 역동적인 현장입니다. 거친 호흡, 격한 흥분, 긴박한 장면에서 플레이어나 관중 모두가 피가 끓어오릅니다. 스포츠에서 승리의 전략, 위닝 스피릿, 팀 케미를 찾아내고 일상의 삶, 조직의 관계에 적용시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포츠에는 다른 면도 있습니다. 엄청난 긴장감 속에서 평상심을 찾고, 실패를 딛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철학자의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운드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심호흡하는 어느 투수의 모습, 동네를 거닐며 거친 마음을 고르는 선수. 용광로 같은 그라운드를 벗어나 소요(逍遙)의 가치를 발견한 그들 역시 철학자입니다.
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 김종문 coachjmoon 지메일
김종문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2011~2021년 NC 다이노스 야구단 프런트로 활동했다. 2018년 말 '꼴찌'팀 단장을 맡아 2년 뒤 창단 첫 우승팀으로 이끌었다. 현재 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KPC)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