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 사주는 사람을 주의하세요. 대가 없는 소고기는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입니다.”
돼지고기집에 걸려 있는 ‘표어’입니다. 돼지고기까지는 선물이고, 소고기부터는 뇌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로 부담을 느낄 만한 정도의 물건은 선물로 주고받지 않는 게 예의입니다. 공직자 등에게 일정 금액 이상의 선물을 하지 못하도록 한 김영란법은 이같은 윤리와 관습을 법제화한 것입니다.
“설날에 왜 선물을 주고받아요?”
어느 해에 설날을 앞두고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이라 엉겁결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설날이면 새해를 맞는 것이고, 그래서, ‘올 한해도 지난해처럼 잘 보살펴주십시오’ 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보살펴달라니… 선물에 그런 마음이 담기면 안 되는 것인데, 뇌물로 읽힐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적절한 답변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질문자가 제 앞에 없었습니다. 제 생각은 깊지 못하고 말은 짧아서 늘 오해만 살 뿐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저는 1962년생입니다. 산업화 사회 이전에 존재했던 설날 풍습을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세대입니다. 옛날에는 설날 선물이 어떠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습니다. (제 기억이 저만의 특별난 기억이 아님은 주변 어른들에게서 쉽게 확인이 가능할 것입니다.)
요즘은 음력 1월 1일을 설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섣달 그믐(음력 12월 마지막 날)부터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까지가 설입니다. 설은 아시아에서 먼먼 옛날부터 전하여온 봄맞이 풍습입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설이 점점 축소되었는데, 어느 틈엔가 정월 초하루만 설이라 하고 대보름은 다른 명절인 것처럼 분리되었습니다.
새해 첫날 아침에는 조상께 차례를 올립니다. 식구끼리 세배를 하고, 그 다음부터 집안 어른께 새해 인사를 하러 다닙니다. 세배를 하고 음식과 술을 나눕니다. 피붙이가 아니어도 동네 어른이면 찾아뵙고 새해 인사를 합니다. 새해 인사를 오면 반드시 음식과 술을 내어놓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먹을거리를 내어놓습니다. 멀리 사는 친인척도 새해 인사를 오고, 또 멀리 사는 친인척을 찾아서 새해 인사를 합니다. 멀리서 온 친인척이 며칠 묵기도 합니다.
새해 인사를 다닐 때에 그냥 가는 법은 없습니다. 음식을 싸들고 갑니다. 손님 맞는 집안의 음식 곁에 손님이 가지고 온 음식이 함께 놓입니다. 어른들 말로는, 잘사는 집에는 선물을 가져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제사나 올렸을까 싶을 정도로 궁핍한 집에는 꼭 음식을 챙겨서 갔습니다. 있는 집이든 없는 집이든 설에는 다같이 배불리 먹어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습니다. 설날 선물이 지금도 온통 먹을거리인 까닭은 설에는 적어도 다같이 배불리 먹어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보름에 한판 크게 놀기 위해 풍물패가 동네를 돌며 추렴을 했습니다. “복 들어갑니다~!” 먹을거리나 돈을 대문 밖으로 내놓으면 풍물패가 이렇게 외치면서 집안으로 들어가 지신을 밟았습니다. 있는 집은 더 많이 내어놓으라고 상쇠가 떼를 썼습니다. 추렴한 재물은 놀고 먹는 데에만 쓰지 않았습니다. 있는 집의 음식과 돈이 없는 집에 갔습니다. 크리스마스 구세군 종소리나 설날 풍물패 ‘매구 노는 소리’나 다르지 않습니다.
선물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 선물에 아무 조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는 물건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선물은 지극히 별난 일이고, 그래서 선물을 받을 때에는 놀랍고 기쁜 것입니다. 설날 선물은 우리가 얼마나 선한 공동체에 살고 있는지 서로 확인을 하는 풍습이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물이라는 이 좋은 말이 정치적 사건으로 오염되고 있습니다. 법적 문제는 일단 내버려두고,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과시 욕망을 위해 받은 물건은 선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한 공동체’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설 무렵에 들리는 말이 영 선하지가 않아 심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