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실력에서 50%도 못 보여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저의 진짜 실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얘기지? 누가 봐도 압도적인 승리였는데 50%도 못 보여줬다니. 필자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공은 미국 종합격투기 UFC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한 ‘코리안 타이거’ 이정영(28)이다. 그는 지난 4일(한국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UFC 에이펙스에서 열린 ‘UFC 파이트 나이트: 돌리제 vs 이마보프’ 페더급 경기에서 블레이크 빌더(33·미국)를 만장일치 판정승으로 눌렀다.
세 명의 부심 모두 30-27로 채점할 정도로 완승이었다. 상대가 아마추어 복싱 미국 주 챔피언을 지낼 만큼 타격이 좋은데 그 선수를 상대로 타격에서 완벽히 압도했다. 그라운드에서 월등한 실력을 뽐냈다. 약점으로 지적되던 테이크다운 방어도 완벽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큰 모양이었다. 그는 왜 UFC 데뷔전 승리를 그렇게 혹평했을까.
“정말 상대를 피니시(KO 또는 서브미션승) 시키지 못한 부분이 정말 마음에 안들었어요. 전체적인 운영에서도 아직 미숙한 부분이 느껴져 50%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도 3라운드 경기를 치르는 동안 세컨 말도 들으려 했고 내가 준비한 것들을 계속 떠올리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웠던 것 같습니다.”
이정영은 작년 2월에 끝난 ‘UFC 등용문’ 로드 투 UFC 시즌 1에서 페더급 챔피언에 올랐다. 당시 결승전에서 중국의 이자(27)를 접전 끝에 판정승으로 누르고 UFC 계약서를 따냈다. 그런데 정작 UFC 정식 데뷔는 1년 만에 이뤄졌다. 파열된 무릎 십자인대 재건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정영의 무릎 십자인대는 이미 로드 투 UFC 토너먼트가 시작됐을 때부터 부상이 심각했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도저히 경기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토너먼트 참가를 결심했다. 일생일대 기회라고 생각해서다. 선수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무릎이 계속 아파서 결승전을 치르기 전 1년 6개월 정도는 레슬링이나 주짓수 훈련을 전혀 하지 못했어요. 처음에는 그냥 인대가 조금 안 좋은 줄 알았는데 계속 낫지 않았어요. 너무 불안해서 8강전을 마치고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는데 인대가 완전히 파열됐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때 부상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이정영은 그 이후 치른 4강전과 결승전은 억지로 이긴 경기였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특히 결승전은 정말 상황이 심각했다.
“그 경기는 솔직히 너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이기기는 했지만 스스로 너무 후회가 많이 남았어요. 어디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당시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수술을 받은 뒤에도 6개월은 이런 느낌이 우울증인가 싶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수술받은 다리가 회복되고 운동을 다시 할 수 있게 되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원래의 저로 돌아오더라고요.”
이정영이야말로 격투기에 진심이다. 로드 투 UFC가 아니었다면 선수 생활을 접었을지 모른다. 격투기 선수로서 회의를 느끼던 시절 마지막 희망의 끈을 잡은 것이 바로 이 토너먼트였다. 그리고 극적으로 기회를 살리면서 ‘꿈의 무대’에 설 수 있게 됐다.
“저는 로드 투 UFC 아니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해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버린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또 수술을 받으면 아무도 나를 신경 써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다섯 군데 정도 다녔는데 두 군데는 수술을 바로 하라고 했고, 세 곳은 인대가 없지만 근육으로 받쳐줄 수 있기 때문에 해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리스크가 컸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정영의 타격은 강한 반면 레슬링이나 그라운드 방어는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로드 투 UFC에서 이자에게 여러 차례 테이크다운을 허용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스베가스에 갔을 때 UFC 레전드 대니얼 코미어가 저한테 ‘레슬링을 못한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그래서 이번 데뷔전에서 나도 레슬링이나 그라운드를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제 부상에서 회복된 만큼 원하는 그라운드 싸움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UFC에서 저의 레슬링 실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정영은 자신을 ‘타격가’가 아닌 ‘웰라운드 파이터’라고 소개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보여줄 것이 더 많다고 강조했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1년이 지나야 100%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경기할 때 오른쪽 무릎이 신경 쓰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젠 킥도 더 화려하게 차고, 그라운드에서도 멋진 기술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발전이 없는 선수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UFC에서 살아남고 증명하겠습니다. 이제 시작인 만큼 더 성장하고 발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