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해서 오롯이 몰입했을 때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있다. 커다란 스크린이 꼭 필요하지도 않고, 어떤 화려한 액션이나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패스트 라이브즈’ 같은 작품은 꼭 영화관에서 봤으면 하는 이유다.
‘패스트 라이브즈’ 장르는 드라마다. 대개 드라마 같은 잔잔한 장르의 영화들을 극장에서 보라고 권하는 경우는 잘 없다. 훌륭한 시각적 볼거리들을 탑재한, 마치 체험하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은 이제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런 사이에 ‘패스트 라이브즈’가 있다. 이 작품은 집에서 TV를 켜서 재생하다 누가 전화를 걸면 잠깐 멈추고, 또 밥을 해먹느라 잠깐 멈추고 하면서 산만하게 보기엔 너무 아쉽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럴 바엔 안 보는 게 낫다. 켜켜이 쌓여 들어가는 이야기의 레이어들은 집중해서 봤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완전히 다른 인상을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해성(유태오)에겐 사랑하는 대상이 있었다. 바로 나영(그레타 리). 12살의 어느 날 나영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12년 후 나영은 미국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SNS에서 우연히 어린 시절 첫 사랑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12년 후 인연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용기를 내 뉴욕행을 택한 해성. 약 20년 만에 다시 만난 나영과 해성은 짧은 시간 동안 함께하며 두 사람이 함께, 혹은 각자 지나온 지난 세월을 되짚는다.
로맨스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사랑’을 소재로 삶을 탐구하는 영화다. 헤어진 뒤 12년이 돼서야 서로 다시 연락을 하고, 거기서 또 12년이 돼서야 다시 만난 영화 속 나영과 해성처럼 ‘패스트 라이브즈’ 역시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조급함이 없다.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장편영화를 연출한 셀린 송 감독은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속도 조절을 탁월하게 해낸다. 느린 듯하지만 리드미컬한 속도감으로 점차 관객들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흔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영화 속 나영은 남편인 아서(존 마가로)에게 ‘인연’에 대해 설명하며 “전혀 모르는 사람 둘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연이 있던 것이고, 결혼을 한다면 8000겁의 인연이 쌓였다는 뜻”이라고 이야기한다. ‘겁’은 길고 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런 시간이 8000번 반복돼야 비로소 우리가 옷깃을 스칠 수 있는 인연이 된다는 것이다. 20여년이 지나 다시 만난 나영과 해성처럼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과거가 된다 해도 끊어지지 않고, 아주 진득하게 이어진다.
그럼에도 과거는 과거다. 인연이란 꼭 ‘현재’에 존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과거의 인연을 과거에 남겨두고, 계속해서 미래로 걸어 나간다. 그렇게 살다 보면 또 언젠가 한 번 서로를 마주할 날도, 다음 생엔 맺어질 날도 있을지 모른다. 헤어져도 끝이 없고 다시 만난다고 꼭 맺어지는 것도 아닌, 물처럼 흐르는 인연의 속성을 ‘패스트 라이브즈’는 아주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나영과 해성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나영의 남편 아서의 시선이 재미있다.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너무나 특별해 보이는데 자신과 나영의 사랑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불안감. 그럼에도 둘을 존중해 주며 인연이란 무엇인가를 배워나가는 아서의 시선은 잔잔히 흘러가는 ‘패스트 라이브즈’ 속 하나의 파장이다.
올해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할 사랑 영화를 단 한 편 꼽자면 단연 ‘패스트 라이브즈’다. 관객들이 영화와 마주하는 시간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꼭 주장하길 바란다. 12세 관람가. 10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