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들어 국제 커플이 많이 보인다. SNS 등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꽁냥꽁냥한 모습이 참 귀엽다. 이들의 해피 엔딩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흔히 문화, 언어의 차이를 꼽는다. 그렇다면 혹시 스포츠도 커플의 장벽이 될 수 있을까? 응원하는 팀이 FC 서울과 수원 삼성이기 때문에, 다퉜다는 커플 얘기는 종종 들린다. 하지만 국제 커플에 스포츠가 잘못 끼어들면 단순한 다툼이 아닌, 참사로 번질 수도 있다. 22년 동안 필자의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해 국내의 연예 기획사에서 일했던 필자는 유연한 근무시간에 페이도 괜찮은 ‘영어 강사’에 관심이 생겼다. 그러나 영어를 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분명 다른 일. 필자는 테솔(TESOL) 영어교사자격증을 취득했다. 하루는 테솔 과정에서 친했던 친구를 만났는데, 자기 학원에 멋진 원어민 선생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필자는 소개를 부탁했다.
그 후 필자와 A(이름 이니셜)는 두 달 넘게 거의 매일 이메일로 연락했다. 장문의 메일을 주고받을 정도로 우리는 잘 통했다. 미국 텍사스주 출신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A는 고등학교 때는 농구 선수였고,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특히 우리는 스포츠를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어 할 얘기가 너무나 많았다. A는 테니스를 가장 좋아했고, 리틀 야구를 잠깐 한 적이 있었던 필자는 야구 얘기를 많이 했다.
필자와 A는 2001년 가을 처음 만났다. 어색했지만, 우리는 같이 밥을 먹었고 영화 ‘물랑루즈’를 봤다. 지금은 없어진 추억의 장소 ‘하드락 카페’로 자리를 옮겨 꽤 긴 시간을 같이 보낼 정도로 재미있었다. 두 번째 만남부터 우리는 친구 이상의 사이가 됐다. 함께 농구를 했고, 프로야구를 보러 잠실구장에도 자주 갔다. 야구 시즌이 끝나면 데이트 장소는 농구장이나 배구장으로 바뀌었다.
2001년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와 애리조나 다이어몬드백스가 만나자 필자는 흥분했다. 당시 애리조나의 클로저는 BK(김병현)였기 때문이다. 살짝 A에게 물어봤다. “이번 월드시리즈 누구 응원할 거야?” 그러자 A가 “이번만큼은 양키스를 응원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이유를 들으니 납득이 됐다. 불과 2개월 전에 9.11 테러로 충격을 받은 미국인 입장에서, 최대 피해 지역이었던 뉴욕시를 연고지로 한 팀을 응원하고 싶다는 것이다.
애리조나 주립대 출신의 A는 BK의 특이하고 역동적인 피칭 폼을 좋아했다. 필자는 자주 우승하는 양키스보다 신생 팀 애리조나의 첫 챔피언 등극을 함께 보자고 구슬렸다. 세상 착했던 A는 흔쾌히 필자와 한마음이 되었고, 우리는 애리조나의 극적인 우승을 즐겼다.
사실 A를 만나기 전 살짝 걱정한 점도 있었다. 그녀는 해병대 출신이었고, 필자의 머릿속에는 이미 할리우드 영화 등을 통해 미해병대의 스테레오 타입이 저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A는 터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다. A는 필자를 향해 ‘시(poem)’를 지을 정도로 감정도 풍부했다. 세상에, 시를 선물로 받다니! 그렇게 정성이 가득한 선물은 처음 받아 보았다. 더불어 필자를 자신의 ‘소울메이트(soulmate)’라고 고백할 때는 정말 감동이었다. 2001년에서 2002년으로 넘어가는 한국의 겨울은 유독 추웠고 눈도 많이 왔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그러던 중 필자가 큰 실수를 했다. 원인은 2002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의 쇼트트랙에서 나왔다. 일본계 미국인 아폴로 안토 오노가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김동성의 금메달을 강탈한 것이다. 사실 9.11 테러의 여파로 당시 동계올림픽은 미국인들의 애국심 경연장이 된 것 같아 씁쓸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당시 분위기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슬로건이었던 “Make America Great Again”, “America First”와 비슷했다. 게다가 필자는 1996 애틀랜타,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이 미국을 만나 억울한 판정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솔직히 그때는 미국이 좀 미웠다.
그때 영문도 모르는 A가 데이트하자고 연락이 왔다. 당시 그냥 잠깐 만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필자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A는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라고 물었고 필자는 솔직히 말했다. 참으로 멍청한 말을 한 것이다. 아니 오노, 심판과 일부 관중의 행동이 A하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지만 A는 그래도 필자를 이해해 줬다.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자체가 유치 과정에서 뇌물이 오간 타락한 대회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그 후에도 우리는 장난치고 농담하며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더 나아가 미래도 얘기할 정도였다. 둘 다 대학원을 미국으로 가자는 말도 나왔고, “미국 어느 지역이 살기 좋을까?”라는 행복한 고민도 했었다. 메이저리그야구 30개 구장을 전부 방문하자는 계획도 세웠다.
2002 한일 월드컵이 열리기 전 A가 미국인답게 축구에는 관심이 별로 없지만, 세계적인 스포츠 이벤트인 만큼 직관을 원했다. 필자는 6월 10일 전주월드컵 경기장에서 8시 30분 열리는 ‘포르투갈 vs. 폴란드’ 경기를 예매했다. 1박 2일 여행에 들뜬 우리는 전주에 일찌감치 도착해 숙소를 잡았고, 그날 오후 3시 30분 시작한 ‘한국 vs. 미국’의 경기를 TV로 시청했다.
경기에 앞서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데 야유가 나오자, A가 불편한 반응을 보였다. 축구 관중은 원래 그렇다고 달래며 계속 경기를 봤다. 좀 불편한 분위기에서 경기를 보던 중 안정환이 쇼트트랙 세리머니를 하자 A는 화가 단단히 났다. 게다가 월드컵 기간 동안 입자고 한국대표팀 셔츠를 이미 구입했던 A는 안정환으로, 필자는 황선홍으로 마킹까지 한 상태였다. A는 안정환 셔츠를 못 입겠다고 선언해, 셔츠는 바꿔 입기로 했다. 하지만 A의 흥분은 계속 이어졌고, 이번에는 필자가 달래줬어야 했다. 그러나 어리석었던 필자는 같이 화를 냈다. 우리는 어느새 한국과 미국의 대변인이 되어, 격한 말을 오랫동안 주고받았다.
우리는 곧 화해했고 폭우 속에 축구도 봤지만, 그날 서로에게 남긴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필자가 왜 그날 그렇게 화를 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한국 스포츠를 너무 사랑해서? 설사 그랬어도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조차 다독여주지 못한 필자의 옹졸함이 너무 부끄럽다. 그 후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 서울에는 여러 가지 이슈로 반미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상대방의 조국에 너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두 나라의 갈등에 점점 지쳐갔다. 한때는 미래를 약속했던 A와 필자. 하지만 믿기지 않는 이유로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