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파리를 여행 중이다. 2024 파리 올림픽을 미리 느껴보기 위해서다. 사실 일부 기념품 가게를 제외하고 파리에서 올림픽 분위기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프랑스인들의 삶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볼 기회가 많았다.
인상적인 경험은 앵발리드에서 찾아왔다. 앵발리드는 프랑스 군사시설의 집합체다.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이곳에는 군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 전쟁 역사를 담은 이곳에서 눈길을 끈 것은 '결투'의 역사를 소개한 전시관이었다.
결투는 불어로 'Duel(듀얼)'이라고 한다. 투쟁으로도 번역된다. 결투는 싸움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정확한 규칙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는 일종의 계약이었다. 결투가 성립하기 위해선 반드시 '합의'가 있어야 하고, '증인'이 필요했다. 굳이 비유하면 오늘날 스포츠와 많이 닮았다.
유럽 중세 시대에는 결투가 사법적인 제도로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재판에서 양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때 결투로 승자를 가리곤 했다. 주로 사용된 것은 검과 방패였지만, 때로 창이나 채찍으로 대결을 벌였다고 한다. 심지어 스타킹에 모래를 채운 참신한 무기도 쓰였다. 하지만 가톨릭교회가 결투를 야만적인 풍습으로 규정, '사법 결투' 또는 '결투 재판'도 사라졌다
대신 결투는 개인의 명예를 건 대결로 색채가 바뀌었다. 프랑스 역사에서 '명예 결투'가 등장한 것은 11세기 말이라고 한다. 이후 1500~1600년대에 가장 활발했다. 기록에 따르면, 1588년부터 1608년까지 20년 동안 1만 명 이상이 명예 결투로 사망했다.
18세기부터 결투에 총이 사용됐다. 영화 '존윅4'에 나오는 마지막 결투 장면이 많이 닮았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검 대신 총을 선호한 이유는 공정성 때문이었다. 검을 사용한 결투는 얼마나 오래 수련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총은 실력 차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공정성이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결투는 법적으로 금지됐다. 공식적으로 마지막 '합법적 결투'는 1967년에 열렸다. 당시 마르세유 시장이었던 가르통 드페르와 프랑스 의회 의원 르네 리비에르 간에 일어났다. 둘은 의회에서 말싸움을 벌이다 드페르 시장이 리비에르 의원에게 "입 닥쳐, 이 바보 같은 놈아"라고 막말을 했다.
리비에르가 사과를 요구하자 드페르는 이를 거절한 뒤 그 자리에서 결투를 신청했다. 결투 방법은 펜싱 검으로 정했다. 물론 검 끝에 안전장치는 달리지 않았다. 당시 그 결투는 프랑스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여러 TV 채널에서 방송했을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결과는 드페르의 승리. 그의 검은 리비에르의 몸통을 두 차례 찔렀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당시 입회자들은 결투를 중단시키고 드페르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하는 일이 없었다.
결투 문화는 프로스포츠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이후 맨주먹 싸움이 늘어났다. 이는 오늘날 복싱의 시초가 됐다. 미국이나 중남미, 아시아 등에서 복싱은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반면 유럽에서 복싱은 귀족들의 취미 생활이었다. 아주 불운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람이 죽을 확률이 낮다 보니, 복싱이 점차 성행했다.
맨주먹 결투에도 분명 룰이 있었다. 대결 방식은 합의에 따라 다양했지만, 공통된 금기 사항은 있었다. 상대가 쓰러지면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땅바닥에서 싸우는 것도 명예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군사박물관도 오늘날 결투의 뿌리를 잇는 스포츠로 복싱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왜 프랑스가 최근까지 미국 종합격투기 UFC의 개최를 허용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된다. 프랑스는 2006년 종합격투기 방송을 금지했다. 2016년에는 철창에서 열리는 종합격투기 경기를 전면 규제했다. 팔꿈치로 가격하거나 쓰러진 선수를 주먹이나 발차기로 가격하는 행위도 못하게 했다. 인권을 중시해야 할 문명사회 가치를 훼손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프랑스도 결국 2020년 그런 규제를 대부분 풀었다, 2022년에는 프랑스에서 사상 첫 UFC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명예를 건 결투 문화를 지켜왔던 프랑스가 UFC와 종합격투기를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많은 고민이 필요했을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