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연애합시다. 라일락 꽃 피면.” 독목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오게 된 석지원(주지훈)은 술자리에서 윤지원(장유미)과 ‘미친 라일락’이 꽃을 피울지 안 피울지를 갖고 옥신각신하다 이를 두고 내기를 걸게 된다. 라일락 꽃이 피지 않으면 이사장직을 내놓으라는 윤지원의 제안에 그러겠다고 선선히 말한 석지원은 대신 라일락 꽃이 피면 자신과 연애하자고 제안한다.
tvN 토일드라마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석지원과 윤지원 사이의 특별하고도 오래된 관계를 드러낸다. 두 사람 집안은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진 철천지원수지간이다. 석지원의 아버지 석경태(이병준)는 윤지원의 할아버지 윤재호(김갑수)가 이사장으로 있는 독목고 재단을 사들여 과거 자신의 사업을 어렵게 했던 복수를 하려 한다. 그러니 석지원과 윤지원의 사이가 결코 좋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내기에서 지면 나랑 연애하자는 말도 ‘딴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윤지원을 석지원이 괴롭히려 하는 말처럼 들린다. 과거 기말고사 성적을 두고 벌인 내기에서 석지원이 윤지원에게 자신이 이기면 사귀자고 하면서 덧붙인 말처럼. “너도 죽어도 하기 싫은 걸 걸어야 내기가 스릴이 있지, 안그래?”
하지만 사사건건 부딪치고 아옹다옹하는 그 관계의 과거들을 하나하나 찾아들어가 보면 둘 사이에 있었던 애틋하고 풋풋하며 달달한 진짜 마음들이 발견된다. 겉으로는 티격태격했지만 사실 고교시절부터 석지원은 윤지원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그 마음을 고백한다. “나한테 너는 태어나 보니까 옆에 있었고, 엄마가 놀지 말라는데 놀고 싶었고, 너만 이기면 된다 하는데 져도 상관없었고, 만나면 맨날 싸우기만 하는데 안보면 보고 싶었어.”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헤어진 두 사람은 18년이 지난 후 독목고 이사장과 체육교사로 재회한다.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는 대놓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를 가져온다. 그러니 그 이야기에서 새로움을 기대하기 어려울 듯싶지만, 의외로 이 서사를 알고 있으면서도 시청자들은 석지원과 윤지원 사이에 벌어지는 밀고 당기는 멜로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그 이유는 한국식의 로맨틱 코미디로 이 뻔한 서사에 긴장감과 설렘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식의 원수 집안 간 대결구도는 교육자로서 학교를 지키려는 윤재호와 사업가로서 그 자리를 밀어내고 골프장을 건설하려는 석경태로 재해석됐다. 올바름의 관점으로 보면 석경태가 빌런으로 그려져야 하는 게 맞지만, 드라마는 로맨틱 코미디답게 캐릭터 자체를 희화화시켜 그런 지나친 빌런화를 빗겨나간다. 또 석지원과 윤지원의 멜로 역시 첫눈에 반했다는 식의 사랑이야기 대신, 어려서부터 툭탁거리고 싸우지만 그러면서 발전된 사랑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석지원의 사랑 표현은 직접적이기보다는 비틀어서 던지는 이른바 ‘츤데레’에 가깝고, 윤지원이 서서히 알게 되는 사랑 역시 이러한 밀당의 반복 속에서 피어난다.
최근 들어 다소 복잡하고 심각한 주제의식을 담은 드라마들 대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드라마에 대한 선호가 생겼다. 어찌 보면 익숙한 서사의 틀을 가져오지만, 그걸 세련되게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 예를 들어 ‘눈물의 여왕’ 같은 작품은 로맨틱 코미디에 가족드라마적 서사를 덧붙여, 신데렐라 스토리를 뒤집는 세련된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로미오와 줄리엣’ 서사를 가져왔는데, 이처럼 집안이 반대하는 사랑의 이야기 역시 이미 그 많은 가족드라마의 틀에서 반복되어온 것들이다. 이른바 ‘혼사장애’라고 부르는 드라마 투르기의 한 방식으로, 남녀가 사랑하는데 집안 차이 등의 반대에 부딪치고 그럼에도 그걸 뛰어넘어 이루는 사랑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익숙한 서사를 새롭게 만드는 건 그래서 참신한 캐릭터와 톡톡 튀는 상황 그리고 대사들을 통해서다.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는 같은 이름을 가진 석지원과 윤지원 캐릭터의 매력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들이 재회하는 상황과 그래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감정들이 톡톡 튀는 대사를 통해 전해진다. 물론 우리는 이미 이 작품이 어떤 결말을 낼 것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편안함 속에서 그 과정들이 어떻게 이어질지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은 여전하다. 특히 주지훈과 정유미의 연기로 빚어내는 그 티키타카의 로맨스와 코미디는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녹여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