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꺾·마. 2022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그룹 스테이지 1라운드에서 패한 프로게이머 김혁규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심경을 전한 뒤 신드롬을 일으킨 유행어다. 이후 국제대회에 나선 스포츠 선수들은 마치 슬로건처럼 이 말을 썼다.
최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중·꺾·그·마'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개그맨 박명수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고 말해 공감을 샀다.
그냥 한다. 많은 의미를 아우른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시련이 닥치고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껴도 그저 버텨내야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
프로야구에서도 생존 자체로 의미 있는 행보를 보여주는 선수들이 있다. 조명 받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며 오랜 시간 그라운드를 지킨 이들이다.
키움 히어로즈 내야수 오선진(36)은 그중 한 명이다. 2008년 한화 이글스에서 데뷔한 그는 커리어 내내 주로 백업으로 뛰었다. 하지만 탄탄한 수비력을 경쟁력으로 18년 째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오선진은 2021년 6월,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며 10년 넘게 뛴 한화를 떠났다. 이후 팀을 자주 옮겨 다니는 '저니맨'이 됐다. 2023년 다시 한화로 복귀했다가, 2024년은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었다. 1년 만에 방출된 뒤 지난해 11월 키움과 계약했다.
오선진은 에이전트를 통해 직접 키움에 연락했다고 한다.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자존심을 버렸다. 지난 1월 말 미국 스프링캠프 출발을 앞둔 그는 "내 역할을 백업"이라며 냉정한 시선으로 자신의 위치를 바라봤다.
올 시즌 초반 어준서·여동욱 등 신인 내야수들에게 밀려 벤치를 지켰던 오선진은 지난주부터 선발 출전 기회가 늘었다. 지난 27일 인천 SSG 랜더스전에서는 '인생 경기'를 펼쳤다. 0-0이었던 3회 초 2사 만루에서 리그 대표 투수 김광현을 상대로 홈런을 쳤다. 데뷔 18년 차, 통산 1157경기 만에 처음으로 기록한 만루홈런이었다. 오선진은 4회 초 만루에서는 사구로 타점을 올리며, 개인 한 경기 최다 타점(5개)까지 경신했다.
오선진은 전날(26일) SSG전 연장 10회 초 타석에서도 1-1 균형을 깨뜨리는 적시타를 치며 이 경기 결승타를 기록했다. 키움 이적 뒤 가장 뜨거운 주말을 보냈다.
오선진은 "이적을 많이 하다 보니 '뭔가 보여줘야 한다'라는 강박이 컸다. 하지만 키움에 온 뒤에는 '남은 선수 인생은 그저 즐기자'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쫓기는 마음을 지우니 내 야구가 되더라"라고 했다. 27일 만루포로 주목받기 전에도 그는 "경기에 나갈 수 있어서 행복하다. 야구를 할 날이 많이 남아 있기 않기 때문에 하루하루 즐기고 있다"라고 했다.
하루라도 더 선수로 뛰기 위해, 오선진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매진했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으로 빛난 날이 다시 찾아왔다.
버텨내고 생존하며 자신의 근성을 증명한 오선진의 행보에 감정 이입한 야구팬이 많았던 것 같다. 관련 기사 조회수도 높고, '좋아요'를 누른 독자도 많았다. 야구팬은 새 얼굴 등장만큼이나 오랜 시간 그라운드를 지킨 선수들의 분전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