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유튜브 채널 스브스 캐치, KBS 드라마 캡처 배우 장서희가 복수의 여왕에서 가스라이팅 여왕으로 변모했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라며 눈 밑에 점 하나를 찍고 복수를 다짐했던 그 시절. 2008년 11월부터 2009년 5월까지 방영돼 최고 시청률 33.6%를 기록했던 인기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줄거리다. 이 드라마를 통해 배우 장서희는 ‘복수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에도 장서희는 ‘복수’와 관련된 드라마를 꽤 했었다. 친오빠를 죽음으로 내몬 여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대리모를 자처한 여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 ‘뻐꾸기 둥지’(2014), 거대 악에 희생된 두 모녀의 핏빛 대결 ‘마녀의 게임’(2022)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지난 8월 첫 방송한 KBS2 일일극 ‘욕망의 덫’을 통해 오랜만에 복수극으로 귀환했음을 알렸는데, 이번에는 ‘아내의 유혹’을 뛰어넘을 만큼 희대의 악녀다. 사진= KBS2 일일드라마 ‘욕망의 덫’ 캡처 ‘욕망의 덫’은 살인 누명으로 인생을 빼앗긴 여자가 거대한 욕망에 맞서는 운명 복원 복수극이다. 여기서 살인 누명으로 인생을 빼앗긴 여자는 고은설 역의 전혜원, 거대한 욕망은 주미란 역의 장서희를 말한다. 장서희가 1번 주연이지만 복수의 주체가 아닌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장서희는 앞서 ‘욕망의 덫’ 제작발표회를 통해 “이전 작품에서는 늘 피해자였다면 이번에는 다르다. 주변 인물을 가스라이팅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무서운 인물”이라고 주미란 캐릭터를 설명한 바 있다.
상대방의 자주성(自主性)을 교묘히 무너뜨려 자신의 영향력 아래 가두려는 ‘가스라이팅’은 우리 사회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문제다. 심리적 지배가 폭력이나 범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이 꾸준히 지적돼 왔다. 장서희가 연기한 주미란은 ‘가스라이팅’을 무기로 삼아 청마그룹 사람들은 천천히 짓밟고 올라선다. 청마그룹에는 대표이사 강영훈(유태웅)과 그의 아내이자 청마장학재단 이사장 김정선(윤해영), 이들의 딸인 청마그룹 디자인팀 팀장 주새벽(강해라)이 핵심 인물로 자리한다. 이들은 모두 주미란의 ‘가스라이팅’ 대상이자 소위 말해 ‘돈은 많고 뇌는 순수한’ 가족이다.
주미란은 주새벽의 유모로 이들의 집에 잠입한 뒤, 현재는 청마장학재단 홍보실장으로 활동하며 직위를 높여가고 있다. 개명 전 이름은 주애숙이었으며, 27년 전 아기를 바꿔치기하고 고은설에게 살인 누명을 씌워 10년 동안 감옥에 있게 만든 장본인이다. 장서희는 이런 주미란을 두 개의 얼굴로 그려낸다. 청마그룹 사람들과 있을 땐 온화하고 헌신적인 미소를 보이지만, 카메라 앵글에 혼자 등장할 때면 숨겨둔 발톱을 드러내듯 독기 가득한 표정이 프레임을 꽉 채운다. 장서희가 첫 방송 전에 “나이가 든 뒤 독기가 빠져 재충전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욕망의 덫’ 쇼츠만 뜨면 주미란을 향한 욕으로 가득한 댓글창을 보니 충전에 성공한 것 같다. 사진=KBS 제공 장서희의 이같은 활약 속, 총 100부작으로 편성된 ‘욕망의 덫’ 시청률 추이도 긍정적이다. 1회 6.4%로 시작해 5회 만에 시청률 7%를 넘었으며, 이후 7%대 중후반을 유지하다가 지난 14일 방송된 26회에서 8%(닐슨코리아 전국 가구)로 자체 최고를 찍었다. ‘욕망의 덫’의 전작 ‘붉은 진주’가 94회에서 최고 시청률 8.2%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빠른 성장세다. 장서희라는 세글자가 주는 장르적 신뢰감과 그와 팽팽하게 맞서는 전혜원의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이 좋은 앙상블을 이뤄냈다는 평가다.
과거 지상파 일일극이 20%대 시청률을 웃돌았던 것과 비교하면 화려한 숫자는 아니지만, 시청 형태가 분산됐고 아직 70회 이상을 남겨둔 상황에서 시청률 곡선이 우상향하고 있다는 건 고무적이다. 하지만 지난 21일부터 10월 2일까지 ‘여기는 나고야’ 중계 방송으로 인해 2주간 결방하면서 시청률 상승에도 제동이 걸렸다. 제작진에 따르면 10월 5일부터 방송이 재개된다. 30회에서는 주미란의 과거와 정체가 주변 인물들에게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드라마의 또 다른 전환점을 예고했다. 2주간의 공백에도 다시 시청자들의 리모컨을 붙들 힘은 충분해보인다.
방송 밖에서 불거진 예상치 못한 변수도 있다. 최근 ‘욕망의 덫’ 출연 배우 중 한 명이 부산 오피스텔 추락사 사건 가해자의 친누나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불거졌다. 다만 현재까지 장서희를 중심으로 쌓아온 극의 몰입도와 시청률 상승세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은 모습이다. KBS 측 역시 “공사는 프로그램 캐스팅 시 출연자 본인의 범죄 이력이나 사회적 물의 여부는 검증하지만 출연자 가족의 사전 검증은 시행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