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2000년대 감성을 재현한 드라마가 새로 나온 줄 알았다. 영상 속 주인공들도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신인 배우 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AI로 제작한 숏폼 드라마였다. AI 특유의 이질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작품은 누구의 손에서 탄생했나 찾아보니 팔로워 7만 명을 보유한 ‘몽땅거침없이순풍감자별’이었다.
‘몽땅거침없이순풍감자별’은 ‘몽땅 내 사랑’, ‘거침없이 하이킥’, ‘순풍산부인과’, ‘감자별’ 등 한국 시트콤 제목에서 한 단어씩 따와 만든 이름이다. 이름뿐 아니라 콘텐츠 곳곳에도 2000년대 감성이 묻어난다. 남자 주인공의 샤기컷부터 비즈 액세서리, 원색 카디건과 니트, 체크무늬 교복까지 당시 유행을 그대로 옮겨왔다. 여기에 따뜻하면서도 살짝 탁한 화면 색감과 과장된 표정·대사까지 더해져 그 시절 시트콤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몽땅거침없이순풍감자별’ 운영자는 2001년생 최제현 씨로, 현재 koreansitcom을 운영하며 AI를 활용한 숏폼 콘첸츠와 영상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일간스포츠를 통해 “원래 사진가로 활동하며 촬영과 연출을 해왔고, 생성형 AI를 접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영상에 대한 감각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게 됐다. AI관련 전문 교육을 따로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AI로 만들어진 정교한 기술만이 아니었다. AI는 콘텐츠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 일 뿐, 이를 활용해 어떤 드라마를 연출할지는 오롯이 창작자의 몫이다. 최제현 씨의 AI 숏폼 콘텐츠 제작은 ‘이야기와 상황 정하기’에서 시작된다. 이후 시대적 배경과 캐릭터를 정하고 의상·헤어·공간·소품 같은 비주얼을 설계한다. 그다음 장면별로 카메라 앵글과 인물의 동선, 표정, 대사까지 정리해서 AI로 생성한 뒤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여러 번 수정을 거친다. 사진=‘몽땅거침없이순풍감자별’ SNS 캡처 결과물은 어떤가. 가장 높은 조회수 411만 회를 기록한 ‘너 냄새나’ 편을 먼저 보자. 양볼에 울긋불긋 여드름이 올라온 통통한 남학생이 예쁘장한 여학생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난 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미안한데 너 냄새나”. 매몰차게 차인 남학생은 곧장 줄넘기 다이어트에 돌입하고, 얼마 뒤 배우 현빈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그 순간 흘러나오는 노래는 “왜 내 눈앞에 나타나~”. 현빈이 주연한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OST ‘나타나’다.
이외에도 학원물과 가족 시트콤은 물론 ‘안녕, 프란체스카’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캐릭터까지 2000년대 안방극장의 장르와 문법을 두루 소환한다. 길어야 20~30초 남짓한 영상이지만 반응은 뜨겁다. 게시물 상당수가 조회수 100만 회를 넘겼고, 많게는 400만 회 이상을 기록했다.
이 같은 ‘그 시절 감성’은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최제현 씨는 “단순히 화면에 옛날 필터를 씌우고 화질을 낮춘다고 해서 2000년대 드라마처럼 보이는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 의상, 가방 등 스타일링부터 공간의 인테리어와 간판, 소품, 조명, 카메라 구도와 움직임까지 당시 드라마를 계속 찾아보며 디테일을 맞춘다. 등장인물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다. 샤기컷이 잘 어울리는 꽃미남부터 청순한 첫사랑상, 개성 강한 조연까지 그 시대 드라마에 실제로 등장했을 법한 인물을 구현한다.
비주얼만큼 공을 들이는 건 ‘말투와 대사’다. 시대마다 자연스럽게 쓰이는 언어와 대화의 호흡이 다른 만큼, 2000년대 드라마 속 연인들이 어떻게 대화했는지부터 화를 내거나 고백할 때 어떤 표현을 썼는지, 대사 사이의 뜸과 리액션까지 살핀다.
최제현 씨는 “과거에는 한 회에 30분, 60분씩 보던 드라마의 감정과 이야기를 15~30초 안에서도 사람들이 이해하고 웃거나 설렐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옛날 드라마의 외형을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긴 호흡의 이야기를 수십 초 안에 압축하는 ‘숏폼의 문법’까지 필요한 것이다. 사진=‘몽땅거침없이순풍감자별’ SNS 캡처 이제 인스타그램은 일상 공유를 넘어 ‘릴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서사 창작의 무대로 거듭났다. ‘몽땅거침없이순풍감자별’을 비롯해 한국 무속·설화를 다루는 ‘노점프스케어’, 2000년대 일본 청춘물을 재현한 ‘지현’ 등 실사 촬영 하나 없이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계정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수많은 생성형 AI 계정 사이에서 ‘몽땅거침없이순풍감자별’이 단연 돋보이는 이유는 결국 ‘연출력’에 있다. 누구나 같은 AI 기술을 쓸 수 있는 시대에 기술 자체보다 ‘무엇을 담고 어떤 감정을 끌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창작자의 감각이 차이를 만들어낸다. AI 숏폼을 넘어 단편영화 제작까지 영역을 넓힌 최제현 씨 역시 “기술은 순식간에 변화하지만 창작자 고유의 연출 색깔은 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상 단 몇 초만으로도 “어? 이거 koreansitcom 작품 아니야?”라는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 그의 목표다.
결국 최제현 씨는 AI 시대에 살아남는 법으로 ‘창작자 본연의 정체성’을 제시한다. AI가 연기를 펼치는 ‘퍼포머’라면, 창작자는 방향성과 이유를 결정하는 ‘총감독’이라는 것. 그는 AI 시대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짚었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AI가 출력해 낸 정교한 화면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사람의 감각과 취향입니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차이를 만드는 건 오직 창작자의 시선뿐이죠.”